도스토예프스키의 '상처받은 사람들'은 학대와 고통을 받는 이들의 내부에 꿈틀거리는 '구원자적 환상'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괴테의 '빌헬름마이스터 수업시대' 이후 정착되어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아름다운 영혼'이란게 과연 말그대로 정말 아름다운가? 라는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쉽게 말해 한없이 희생적인 존재. 즉, 작품에서처럼 상대의 행복을 위해 떠나주는 '나타샤'라는 존재가 태어날 수 있게하는 근원적 원인이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만들었다는 말.
지젝은 이러한 희생적, 구원자적 태도에 대해 이 것은 주체가 (오만하게도) 마치 세상의 모든 비밀을 다 아는 양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며 '나의 수난은 언젠가 보상받을 것'이라는 맹목적 믿음으로 현실을 살게 하는 동인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구원자라는 환상의 내면에는 분명히 이러한 보상심리 -막연한 미래나 내세에 대한 거창한 믿음까지는 아니더라도- 가 자리잡고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해변의 여인'에서처럼 '문숙'(고현정)을 구원자라 인식하는 '중래'(김승우)는 어찌보면 상처받은 사람들이 꿈꾸는 가해자의 표본이다. 희생과 인내속에는 상대가 이 모든 고통을 인식하리라는. 그래서 언젠가는 뉘우치고 돌아와주거나, 최소한 후회라도 하기를 바라는 전혀 아름답지 못한 모순이 내재되어있다.
무엇이 버림받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이러한 희생과 인내를 가능하게 하는가? 혹은 무의식이라는 형태를 통해 이를 강요하고 있는가? 낭만주의 사조의 도래? 기독교적 희생의 세뇌? 답은 역시나 뻔하다. 허나 문제의 본질은 내가 이 의문의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 아니 정확하게는 이 모든 정념을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내려다보며 발꼬프스키공작처럼 한바탕 조소를 퍼붓지 못한다는데 있다. 분명히 '고통을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 인생'과 '스스로를 고통으로 내모는 구원자적 태도'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단순히 고통을 즐기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고통과 상처에 대해 어떠한 답이 필요한가? 해답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모르는 척하며 고통속에 나를 옭아매고 무너져버리라고 부추기는 또다른 내가 소름끼치게 무섭다.
고통과 상처, 인내와 희생. 그리고 구원자. 아직 '죄와벌'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러한 물음들에 나는 벌써부터 바들바들 떨고있는 중인게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