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2월 29일 화요일

슬픔이여 안녕

'슬픔이여 안녕'

원작인 사강의 소설은 사실 'Au revoir, tristesse'가 아닌,

'Bonjour, tristesse' 이지만서도... ;;

다분히 전자의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로 2009년 마지막 영화의 선정을 마쳤다.

 

한편, 올해의 '영화 100편 보기' 목표는 결국 '99편'이라는 아쉬운(!) 결과로 마무리짓게 될 것같다.

서울시내 곳곳의 영화관에서 누군가와 함께 또는 홀로 있었던 시간들을 떠올리고 있자니, 왠지 1편은 그들에 대한 예의상 비워두어야할 것만 같더라. 그 서럽고도 애틋한 마지막 한 편의 여운을 길게 이어나가고 싶다.

 

2009년 12월 23일 수요일

노래 하고 시퍼요.

<결국 누구나 혼자인 거라고>라는 문장을 보며.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시스템도 유기체든 기계든 있는 그대로의 외부 환경을 완벽하게 인식하고 처리하지는 못한다. 우리 인간의 인지시스템도 예외는 아니어서 세상에 대한 '환상 illusion' 혹은 재구성된 세계를 '표상 represent'할 수 있을 뿐이다. 어떤 '환상' 속에서 사는가는 그 시스템의 인지 구조, 즉 외부 환경에서 정보를 입수하여 처리하는 방식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서로 다른 인지 구조를 가지고 있는 생물들은 저마다 다른 '환상'속에서 살고 있다. 인간의 '환상'은 인간의 인지구조와 실제 세계 간 상호 작용의 결과이며 심리학은 이러한 상호 작용을 이해하고자 하는 학문이다."

(김상인, 21C 다윈혁명 中)

 

 각 생물들은 (종별로) 서로 다른 인지구조를 가지고 있기에 다른 디자인(외관)을 지닐 수 밖에 없다는 내용의 글을 읽으며, 같은 종 안에서라도 각각의 개체별 인지구조 내에 개별적인 차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이러한 맥락아래 생각해보니 '(사람은) 결국 누구나 혼자이다.' 같은 문장은 꽤 그럴듯하게 보이는게다. 즉 이 전제에 따르자면, 똑같은 '환상'과 똑같은 '세계' 속에서 두 사람(혹은 다수)이 동시에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기에, 인간은 엄밀하게는 정말로 세상 속에서 혼자일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 도출된다는 말.

 

 생각해보면 세상에는 (같은 인간임에도) 너무도 달라 '이해불가'를 넘어 '화까지 나게하는' 다양한 인식체계의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신문의 정치면만 살짝 훑어봐도 이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주변과 외부 세계에 대한 '인식'이 애초부터 서로 근본적으로 달랐기에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나는 내 나름대로 마치 다른 (솔까말, 적대적인) 종마냥 이질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살다보면 나와 정말 비슷한 인지체계를 지닌 다른 개체를 만나는 경험도 하게 되는데, 나는 이를 종종 '함께 산책하는 것'이라고 추상적으로 표현하곤 한다. 전혀 공통적인 것이 없어보이는 생뚱맞은 관계 속에서도 이상하리만치 함께 있으면 편안한 사람들이 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이들에게는 나와 비슷하게 외부를 인식한다는 특징이 있었다. 이들과 함께 있을 때면, 숲 속의 한적한 오솔길을 기분 좋게 어슬렁거릴때마냥 안정되고 나근한 느낌이 든다.

 

 내가 요사이 책을 읽는 데 있어, '저자와 산책하며 도란거리듯 읽고 싶다'는 태도를 유지하는 것도 어찌보면 이것들에 기인한다. 위대한 사상을 뛰어넘어 내 사유의 체계를 뉴욕의 마천루마냥 쌓고 싶은 욕심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물론 내게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얘기이니 논할 필요가 없는게고.ㅋ) 그보다는 좀 더 많은 타자의 '환상'과 '세계'를 경험하고 싶다는 욕심이 더욱 앞서는 것이다. 내가 꿈꾸는 비평의 태도 역시 이러한 맥락을 같이 한다. 타자의 인지체계시스템으로 구축된 그의 '환상이 탄생시킨 환상'과 그로 인해 깨어지고 찢겨지는 나의 '환상과 세계' (흠. 역시나 내게 있어 예술이란 마조히즘적인걸까? ㅋ)에 대해 구체화할 수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금요일 저녁과 푸쉬킨

사무실 창 밖을 내다보니, 나무 가지들이 휑한게 이제는 완연한 겨울이다. 가을이 빨리 지나버려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능. 다만 너무나 추워진 날씨 탓에 오들오들 떠는라 쓸데없는 지출이 많아지는게 안타까울 뿐이다. 만약 일년 내내 따뜻한 날씨 속에 살 수 있었더라면 내 옷 방의 2/3는 빈공간이였을 테고, 그랬더라면 난 아주아주 부-자로 살고 있을게다. 이건 허풍이 아니라 정말로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도 금요일 저녁인데, 퇴근 후 연구실로 향해 책이나 읽자니 왠지 쓸쓸하다. 습관의 기억이란 이래서 무서운 것이다. 이번주 내내 도선생님 발제를 준비중인데, 우연히 접하게 된 푸쉬킨의 시 몇 편 때문에 혀뿌리가 싸해져서, 가뜩이나 안써지는 발제문이 더 안써진다.

 

펼쳐두기..

   (모든 것이 끝났다, 1824)

 

펼쳐두기..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1829)

 

이 지극히 애도적인 유형의 시들 속의 눈에 띄는건 '사랑'보다도 '했다'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아직 약간은 남아있지만, 그 때문에 괴롭히지는 않을 것이란 고백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분히 이타적이고 희생적으로 보인다. (이 시들을 아무 생각 없던 예전에 읽었더라면 '도덕적으로 가장 숭고한 시'라는 세간의 평가에 나는 어느 정도 수긍했을 것이다.) 허나 (아직은 조금 남아있더라도) 다 꺼져가는 사랑 가지고 (희생하는 척) 선심을 베풀고 있는 것이라면, 푸쉬킨의 이 시들은 '도덕적으로 가장 추악한 시'이다. (단연코 지금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아직 다 꺼지지 않았는지도.'라는 시어의 뉘앙스에서 느껴지는 묘한 역설의 분위기를 부정할 수만은 없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으로 푸쉬킨의 시어들과 이리저리 놀다보니 또 하루가 갔다. <노름꾼>발제는 아직 야마도 못잡은 주제에 자꾸만 이렇게 샛길에서 놀아나니 이거 정말 큰일이다.

 

2009년 11월 16일 월요일

상처받은 사람들

도스토예프스키의 '상처받은 사람들'은 학대와 고통을 받는 이들의 내부에 꿈틀거리는 '구원자적 환상'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괴테의 '빌헬름마이스터 수업시대' 이후 정착되어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아름다운 영혼'이란게 과연 말그대로 정말 아름다운가? 라는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쉽게 말해 한없이 희생적인 존재. 즉, 작품에서처럼 상대의 행복을 위해 떠나주는 '나타샤'라는 존재가 태어날 수 있게하는 근원적 원인이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만들었다는 말.

 

지젝은 이러한 희생적, 구원자적 태도에 대해 이 것은 주체가 (오만하게도) 마치 세상의 모든 비밀을 다 아는 양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며 '나의 수난은 언젠가 보상받을 것'이라는 맹목적 믿음으로 현실을 살게 하는 동인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구원자라는 환상의 내면에는 분명히 이러한 보상심리 -막연한 미래나 내세에 대한 거창한 믿음까지는 아니더라도- 가 자리잡고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해변의 여인'에서처럼 '문숙'(고현정)을 구원자라 인식하는 '중래'(김승우)는 어찌보면 상처받은 사람들이 꿈꾸는 가해자의 표본이다. 희생과 인내속에는 상대가 이 모든 고통을 인식하리라는. 그래서 언젠가는 뉘우치고 돌아와주거나, 최소한 후회라도 하기를 바라는 전혀 아름답지 못한 모순이 내재되어있다.

 

무엇이 버림받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이러한 희생과 인내를 가능하게 하는가? 혹은 무의식이라는 형태를 통해 이를 강요하고 있는가? 낭만주의 사조의 도래? 기독교적 희생의 세뇌? 답은 역시나 뻔하다. 허나 문제의 본질은 내가 이 의문의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 아니 정확하게는 이 모든 정념을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내려다보며 발꼬프스키공작처럼 한바탕 조소를 퍼붓지 못한다는데 있다. 분명히 '고통을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 인생'과 '스스로를 고통으로 내모는 구원자적 태도'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단순히 고통을 즐기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고통과 상처에 대해 어떠한 답이 필요한가? 해답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모르는 척하며 고통속에 나를 옭아매고 무너져버리라고 부추기는 또다른 내가 소름끼치게 무섭다.

 

고통과 상처, 인내와 희생. 그리고 구원자. 아직 '죄와벌'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러한 물음들에 나는 벌써부터 바들바들 떨고있는 중인게다.

2009년 11월 13일 금요일

Sour Times - Portishead

가을밤은 깊어가는데, 나는 마치 처음 이사왔던 때마냥 방구석에 움크리고 앉아 하루종일 빈둥빈둥이다. 새로 산 마라톤화를 신고 근처나 한바퀴 뛰어볼까. 라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으나,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

 

사실 음악을 듣는 일조차 고통으로 느낄만큼 감수성이 예민해진 상태인데, 이런 때 듣는 포티쉐드는 물에 빠져 3분쯤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손에 쥐어주는 쥐약과 같은게다. '사람은 그저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이야기하던 루쉰의 텍스트를 읽어놓아 참 다행이다.

 

ps. 그래도 뉴욕 오케스트라버젼은 경쾌해서 그나마 나아.

 

2009년 11월 12일 목요일

Sonata Tempest mvt.3 - Beetoven

 '내 피아노'란 놈이 생긴 이래로 그 위에 '베토벤 소나타2'가 항상 펼쳐져 있던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이 곡 'Tempest' 3악장 때문이다. 우연히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후, 변변한 레슨 한 번 없이 나는 이 곡만이 내 피아노 인생의 최종 목표인양 연습하곤했다. 때문에 내 모든 피아노 연습의 끝은 언제나 이 곡으로 (그것도 안단테 버젼으로!) 끝났다는 슬픈 이야기. (우리 이웃들은 어떻게 쟤는 20년 동안 같은 곡만 치고 있냐고 한숨지었을 것이 분명하다.)

 

 얼마전 본가를 방문해 피아노를 뚱땅거리다가 다시 악보를 펼쳐보았는데, (눈으로는 악보를 쫓아가지도 못한 반면) 손가락은 이 모든 선율을 기억하고 있는 신기한 현상을 체험. 무슨 기관없는 신체도 아닌데, 손가락이 내 의지나 기억과 상관없이 저절로 움직였던게다. '습관의 기억'이란 존재에 새삼스레 오싹해졌던 순간.

 

ps. 'Tempest'란 제목에서 짐작 가능(?)하듯, 이 곡은 베토벤이 셰익스피어의 태풍(The Tempest)를 읽고난 후 작곡한 곡이다. 그래도 명색이 영문과 출신인데, 20년동안 한 곡만을 연습하면서 새까맣게 몰랐다. ㅎ

 

2009년 11월 7일 토요일

이끎과 무심함 (미쉘푸코, '바깥의 사유')

아마도 욕망이 사드에게, 권력이 니체에게, 사고의 물질성이 아르토에게, 위반이 바타이유에게 차지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블랑쇼에겐 이끎 l'attirance, 즉 순수하고 가장 적나라한 바깥의 경험이다. : 블랑쇼가 뜻하는 이끎은 그 어떤 매력에도 기대지 않고 그 어떤 고독도 마다하지 않으며, 여하한 실제적 교섭의 토대도 만들어주지 않는다. 이끌린다는 것은 외부의 유혹에 의해 초대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백과 벌거벗음 속에서 외부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며, 그 현존과 결합됨으로써, 우리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외부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끎은, 또 다른 내면성에게로 접근하라고 내면성을 부추기는 대신, 외부가 열린 채, 내밀함도 없이, 보호 장치도 없이, 아무 유보 없이(내면성을 지니지 않은채, 모든 폐쇄 장치 바깥에 무한히 펼쳐지는 외부가 어떻게 이런 것들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거역할 수 없게 표명한다 ; 그러나 외부가 결코 자신의 본질을 건네주지 않기 때문에, 그 이끎은 동시에 이 열려 있는 상태 그 자체엔 이를 수 없음을 표명한다. 외부는 실제의 현존 -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대한 확신에 의해 내부로부터 조명되는 것- 으로 자신을 나타낼 수 없다. 단지 자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물러나, 마치 다시 만나는 일이 가능하기라도 하는양 사람들이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가 만드는 기호속에 함몰하는 부재로 나타날 수 있을 뿐이다. 열려 있음의 경탄할 만한 단순함 때문에, 이끎은 이끌린 자의 발 밑에서 무한정 열리는 공백 외엔, 마치 그가 거기 없기라도 한 듯 그를 맞아들이는 무관심 외엔, 저항하기엔 너무 강경하고 해독해내어 결정적인 해석을 가하기엔 너무 애매모호한 침묵외엔 아무것도 제공할 것이 없다. ...

 

이끎의 필수적인 상관물은 무심함 la negligence 이다. 양자의 관계는 복합적이다. 이끌릴 수 있으려면 인간은 무심해야한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해버리는, 그리고 자신의 과거, 가까운 친척들, 그런 식으로 외부로 내던져진 자신의 다른 삶 일체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본질적인 무심함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런 유의 무심함은 열중함 zele의, 모든 장애를 무릅쓰고 자신을 이끌림에 내맡기겠다는, 혹은 더 정확히는 (이끎엔 실증성이 없기 때문에) 공백 속에서 이끎 그 자체의 목적도 동기도 없는 움직임이 되려는 이 무언의, 정당화되지 않은, 끈질긴 몰두함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다. ...

 

그러나 이 열중함은 항상 깨어있는 걸까? 이것은 어떤 소홀함을 - 삶 전체, 과거의 온갖 애착, 모든 친척을 일체 아랑곳하지 않는 것과 비교해볼때 외관상으로는 더 사소해보이지만 훨씬 더 결정적인 소홀함을 범하지는 않는가? 이끌리는 인간을 쉼없이 나아가게하는 이 발걸음은 정녕 멍청함이나 오류가 아닌가? <나와 동행하지 않았던 자>와 <정해진 순간에>에서 여러차례 환기되었듯이 '그만해두면, 그 정도로 만족해선' 안되었을까? 이끎이, 자신의 은신처 깊숙한 곳에서, 물러나 있는 존재에게만 마지못해 말을 건네는 데 반해, 열중함의 본령은 자신의 고유한 근심거리로 난처해하는 것,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온갖 방안을 강구하는 것, 자신의 집요함에 열중하는 것, 이끄는 힘을 앞질러가는 것이 아닌가? 소홀한 것, 숨겨진 것이 어딘가에 있다고, 과거가 되돌아오리라고, 그러도록 되어있다고, 그것은 예기되고 보살펴지고 감시되고 있다고 믿는 것이 열중함의 본질이다.  ...

 

열중함과 무심함을 무한히 뒤집을 수 잇는 두 모습으로 만드는 이 엄청난 불확실성의 근원은 틀림없이 '그 집을 지배하고 있는 무관심 incurie(아미나다브 p.235)' 속에 있다. 다른 모든 것들보다 더 눈에 띄고 더 은폐적이고 더 다의적이지만 더 근본적인 무심함. 이 무심함을 드러내는 모든 것들이 의도적인 기호로, 은밀한 집중으로 염탐으로, 책략으로 해독될 수 있다. : 어쩌면 게으른 하인들은 숨겨진 힘을 지니고 있는 지도, 어쩌면 주사위판은 오래 전부터 책들 속에 적혀 있는 제비를 나누어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선 열중함이 자신의 필요불가결한 그림자 부분인 무심함을 덮어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심함이 열중함을 숨기고 있다. : 무심함을 드러내거나 감출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무심함이 너무나 무관심한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에, 모든 동작이 무심함과 관련하여 기호의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 : 이끎의 기원은 무심함 자체가 매혹시킨 자를 맞아들이는 무심함과 완전히 일치한다. ; 무심함이 행사하는 구속력(이것이야말로 어째서 그것이 절대적인지, 그리고 어째서 절대적으로 비상호적인지의 이유이다.)은 단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구속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이 관계에 묶일 경우, 더 이상 순수하게 열려 있는 부름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순수하게 열려 있는 부름이 어찌 -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시간이 지나가고 되돌아오도록 내버려두고 사람들이 접근해오는 것도 내버려둠으로써- 본질적으로 무심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것은 무한한 외부에 있는데, 그 바깥엔 아무도 없는데, 그것이 내면성의 모든 형상을 순수한 분산 속에 해체시켜버리는데?

 

사람은 소홀한 만큼 부름받는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열중함이 소홀함을 개의치 않는 것, 자신 스스로가 대담하게 근심으로 화하는 것, 빛이란 결국 소홀함에 불과하다는 사실, 즉 빛이란 그것에 의해 이끌린 무심한 열중함을, 우리가 훅 불어 끄는 촛불처럼, 흩어버리는 밤과 등가를 이루는 순수한 외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까지는 어둠일랑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빛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가 되어야하는 이유이다.

감사.

요사이 나를 휘감고 있는 가장 큰 감정 중 하나는 다름아닌 '감사'이다. (감사합니다. 보다는 고맙습니다. 가 좋은 표현이라지만 '고맙'은 좀 이상하잖아요.ㅜ) 지독하게 유약해진 나에게 끊임없이 베푸는 모든 이들에게 정말로 고맙고 고맙다.

 

무엇보다 이중에서 가장 고마운 대상은 열번이고 백번이고 똑같은 책을 읽어주며 글을 익히게 해준 우리 부모일 것. 내가 만일 문맹이여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상처받은 사람들'같은 글을 읽지 못했었더라면...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도선생님 세미나는 초창기 작품들을 모두 섭렵 후 중반기 작품들에 막 발을 내딛었다. 발전하는 그의 문체와 사상들에 내가 오히려 뿌듯해 어쩔 줄 모르겠다능...(하아. 이 건방진 태도는 무엇인가!)

 

다음으로는 절실히 필요했으나 어마어마한 몸값덕에 망설였던 중국어대사전을 자그만치 55%나 세일해 팔아준 헌책방님 되시겠다. 게다가 이미 한참 전에 절판된 루쉰의 잡문 전집과 아Q정전 원문. 거기에 다케우치 요시미의 평전까지 모두 다 구해놓은 상태. 그렇다. 루쉰의 원문텍스트와 전집 읽어내려가기를 동시에 진행해보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을유문화사의 소설집을 훑어보다 은근슬쩍 매료되버린 루쉰은 혁명과 그 과정에서 지식인의 좌절을 소설과 수필을 통해 예술로 승화시켰다. 진짜 '혁명적' 글쓰기가 궁금하다면 루쉰은 빼먹을 수 없는 작가인 것!

 

게다가 요 몇일 나를 정념의 늪에서 구원해준 블랑쇼의 저작들을 내친 김에 구할 수 있는 한 모조리 긁어모았는데, 워낙에 절판된 책들이 많아서 아직 몇 권이 더 남긴했다. 그린비출판사님들. 제발 어서 빨리 블랑쇼 저작선집을 완성해주소서! '문학의 공간' 읽고 싶어서 몇일을 초조해하고 있다. 블랑쇼 이해의 필수코스인 '푸코의 문학비평' 같은 책은 4500원짜리 정가인 것을 자그만치 만원씩이나 주고 득템! 당분간 내 침대에는 블랑쇼만 출입 허가닷!

 

비록 종교는 없으나 일요일 아침은 그래도 경건하게 무언가 생각을 정리하며 살아야하지 않을까. 라는 고민은 다음주부터 시작될 니체전작읽기 세미나로 말끔히 해소되었다. 때를 맞추어 '나를 알아보고' 새로이 로테이션된 커리큘럼에게 무한하게 감사를 올린다. 대략 한바퀴 돌려면 1년 반은 걸릴 대장정의 돌입. 하필이면 휑해진 주말에 맞추어 이런 기회를 잡다니, 이건 뭐. 운명이다.

 

그 외에 들뢰즈와 예술이란 테마로 음악,미술,영화,문학을 파트별로 접목시켜 1년간 연구할 프로젝트에 등록예정이고, 내년 1월엔 심보선, 조원규 작가들과 함께하는 모임에도 참가 예정이며, 맑스의 자본론 읽기는 당장 다음주 월욜부터 시작된다. 이 어마어마한 스케쥴에 정말 무한히 감사할 뿐이다. 일주일이 아주 그냥 꽉 차버렸네.

 

그런데도 당장 내일은 (텍스트들을 미리 땡겨 읽은터라) 너무너무 한가해져서 시네마테끄에서 상영되는 SF고전중의 고전인 '스페이스오딧세이' 예매를 해두었고, 20대 오빠들과 술자리도 약속해둔 상황. >.< 이렇게 정신없이 여기저기 감사하면서 이번 주도 잘 살아냈다. 혼자 지낸 주말이 이제 고작 2주째인데, 한 2년은 지난 것마냥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참 많이 성장했다.

 

 

2009년 11월 5일 목요일

이렇게 새로이 사랑은 시작되고.

(하이데거 식으로라면) 세상의 모든 '존재자'들이 내게서 등을 돌릴 때.

내 안의 (비인칭적) 자아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실존의 본연이 의심스러워지는 '또다른 밤'을 맞이했을 때.

 

'볼 수 없는 것을 보라' 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라' 고.

이 지독한 역설을 향한 노력만이 진짜 예술이자, 예술적 삶이라고.

말하던 부분에서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고여버렸다.

 

 

 

2009년 11월 3일 화요일

오르페우스

에우리디케를 구하러 저승으로 들어간 오르페우스.

그리고 영원회귀의 운명.

 

더이상 에우리디케를 구하려 하지 않으리.

이따위 운명은 이제 그만 두어버릴래.

 

안녕.

 

 

2009년 10월 31일 토요일

이렇게 바빠서야 슬퍼할 시간도 없다.

일주일 중 유일하게 free-night 이던 목요일에도 ㄷㅈㅌㅍㅌㄹ에서 책을 읽고 새벽까지 발제문을 작성했다. 아프고 슬프다고 투정 좀 부리고 싶어도 시간이 모자란다. 이렇게 서서히 흐려져가는 자신이 밉기도 하면서 대견하기도 하고. 모순된 감정들로 손목의 정맥이 파르르 떨릴 정도.

 

문득 금요일 아침에 거울을 보니, 참 많이 야위어졌구나. 싶더라. 이런식으로 다이어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단 말이지. 언제야 예전처럼 토실토실한 볼빨간 소녀의 얼굴을 되찾을 수 있을라나. 금요일 점심에 그래서 억지로 이것 저것 꾸역꾸역 먹어치웠고, 저녁에 강의를 마치고나서는 술도 마시고 안주들도 주워먹었다. 이렇게 사는것이겠지. 미워하며 밥을 먹고 슬퍼하며 술을 마시고 아파하며 잠을 자는 것이겠지.

 

하루종일 머리가 깨질 것 같고, 온 몸이 뻣뻣해지며, 이유없이 현기증이 난다. 이번에 대구에서 작품이 당선됬다는 아부지의 전화를 받았는데, 제대로 축하해주지도 못했다. 그 복잡한 외부성에 대한 강의에 아무리 집중해도 머릿 속은 현실의 비루한 문제에서 빠져나오질 못한다.

 

도선생님 발제문은 어찌어찌 완성. 이런 식으로 대강 하고싶진 않았는데, 여러사람에게 죄스러워진다.

 

 

2009년 10월 29일 목요일

자. 오늘 밤은.

효도르 오빠와 접신해봅시다!

야마는 괴테의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와 니체의 '우상의 영혼'

문제는 '죽음의 집의 기록' 원 텍스트 조차 다 못읽었다는 것이겠지. ㅎ

 

어설프게 잠들어봤자 온몸에 쥐나서 밤새 아프다고 엉엉 울게 뻔한데, 밤새도록 발제문이나 써야지.

(그나저나 이렇게 막써댈 것이면 차라리 트위터나 개설할 껄 그랬다.)

 

 

 

 

 

 

 

 

 

 

 

 

 

 

 

 

 

 

 

 

Radiohead - No surprises

쓰레기매립지처럼 마음이 가득 쌓여있고... 정부는 우리를 위해 말하지 않아.

아무렇지 않게 듣던 노래들이 그리워진다.

 

 

 

 

2009년 10월 27일 화요일

뻬쩨르부르크야. 기다려라. 내가 간다.

몇일전 주고 받은 대화를 하나하나를 곱씹다가 문득.

"뻬쩨르부르크 여행은 준비 잘 하고 있나?"

라는 질문이 생각났다.

 

서둘러 러시아전문여행사를 검색하고 순식간에 일정과 스케쥴을 결정했다. 러시아라면 거주fee 부터 야간열차까지 무언가 상당히 어려울 것 같아 미뤄놓고 있었는데, 막상 뭐 복잡한거라고는 하나도 없잖아!

그냥 돈만 내면 되는 것이였어. 젠장

이렇게 쉽게 다녀와서는 혼자 힘으로 갔다왔다고 뻥을 치며 잘난척하겠지? 아- 나 병신같다.

여행이란게 이렇게 쉬워서는 안된다. 설레이지만 두려워야하고, 새롭지만 지겨워야한다. 헌데 다들 너무 쉽게 돈 몇 푼 쥐고 여행을 흉내내려고만 한다. 정말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여행을 하고 싶다. 러시아란 곳이 두 번다시 어디론가 떠나기 싫을 정도로 고통스럽고 아픈 곳이였으면 좋겠다.

 

그나저나 어서 끼릴문자라만이라도 빨리 떼고 튜터에게 졸라 인삿말이라도 배워야할텐데... 참! 지난주 도선생 뒷풀이 후기를 전해들었는데, 그 세미나 참석인원중 상당수가 세미나 시작 후 실연을 당했단다. 역시 토요일 저녁에 어두침침한 도선생이나 읽고 있으니 이렇게 된 것이다.

 

꾸역꾸역 살아보자.

내 마음을 크게 두가지. 즉 강한 종류의 것과 그렇지 못한 것으로 나눈다. 약한 마음들이 동하면 회환과 허무의 감정이 솟아 오르고, 강한 마음들이 동하면 이 모두를 긍정하려는 의지가 생긴다. 영원회귀. 이 순간을 인정하고 심연으로 더욱 심연으로 파고들어 무한히 반복해야하는 인생. 언젠가는 영겁의 세월이 축적된 필연에 지쳐있던 내게 또다른 우연이 찾아올 것이다. 그러면 나는 또다시 베르그송의 원뿔중 가장 윗쪽 천장에 켜켜히 부유하던 지금의 기억들을 다시 끌어내려 아래로 아래로 나아가 보겠다고 애를 쓸 것이다. 허무에의 의지.

 

그러나 결국 이러한 생각 역시 서글프게도 삶에 대한 내 강한 의지의 표출일 뿐이다. 살아남으려는 의지를 버리지 못할 바에야, 약한 마음들에 대해 거리에의 파토스를 유지해야한다. 꾸역꾸역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는 것.

 

 

2009년 10월 26일 월요일

잡담

1. 어서 식욕도 되찾고 하혈도 멈추어야할텐데, 이러다간 도저히 몸이 못버티겠다. 도대체 잠을 제대로 자본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나. (결코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어디가서든 튼튼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체력이였는데, 왜이리 약골이 되어버린걸까? 아이고. 그냥 눈 딱 감고 엄마가 말하던 보약이나 해달래야지. 아무리 이러쿵 저러쿵 해도 힘들고 아플땐 역시 가족이 제일인게다. 아무래도 엄마랑 좀 더 친한척 해야겠다. 요사이 갈대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고 계시다던데, 가을가기 전에 민둥산이나 소금강이라도 같이 한번 다녀와야지.

 

2. 약음기도 왔고, 튜닝기도 도착. 리코더나 피리로 튜닝을 해보겠다던 생각 자체가 나같은 상대음감자에겐 나이브한 착각이였을 뿐이었다.(ㅎ) 그건 그렇고, 벌려놓은 일들이 너무 많아져 아무래도 엘리야드 수업은 포기해야하나.를 놓고 고민중.  사실 지금 마음같아서는 다 관둬버리고 혼자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만 싶은데, 이 나이 먹도록 살다보니 어쩔 수 없이 '책임'이란게 생겨버렸나보다. 그것이 돈 몇푼짜리든 스스로와의 약속같은 것이든. 그 아무리 사소한 것이더라도 쉽게 버릴 수 있는게 점점 적어진다. 왠지 서글프다. 실연당한 다음날 세미나 '간식'당번이라니!

 

3. 하루종일 감정이 울컥한터라 일기쓰는 것도 쉽지 않아 몇 번을 지웠다가 다시 썼다가를 반복. 어차피 이 곳은 S 빼고는 아무도 모르는 곳인데, 왜 이러고 있나. 쳇.

 '쾌활', '명랑' 모두 다 개나줘버리라지.

2009년 10월 25일 일요일

Azure Ray - Raining in Athens

Still,

I think of you, baby

and how I grew old with you then

and this summer, you'll call - maybe

and act as if we were old friends

You'd say, 'How are you, baby'

I'd say, 'It's raining in Athens'

 

And to this day

I nurse the fever

that spoiled my poor heart

And I've mastered the art of dealing

slipping away without falling in apart

So when this summer, you'll call - maybe

and ask how I've been

I can be honest and anwser plainly

'Since November, It's been rain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