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욕망이 사드에게, 권력이 니체에게, 사고의 물질성이 아르토에게, 위반이 바타이유에게 차지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블랑쇼에겐 이끎 l'attirance, 즉 순수하고 가장 적나라한 바깥의 경험이다. : 블랑쇼가 뜻하는 이끎은 그 어떤 매력에도 기대지 않고 그 어떤 고독도 마다하지 않으며, 여하한 실제적 교섭의 토대도 만들어주지 않는다. 이끌린다는 것은 외부의 유혹에 의해 초대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백과 벌거벗음 속에서 외부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며, 그 현존과 결합됨으로써, 우리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외부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끎은, 또 다른 내면성에게로 접근하라고 내면성을 부추기는 대신, 외부가 열린 채, 내밀함도 없이, 보호 장치도 없이, 아무 유보 없이(내면성을 지니지 않은채, 모든 폐쇄 장치 바깥에 무한히 펼쳐지는 외부가 어떻게 이런 것들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거역할 수 없게 표명한다 ; 그러나 외부가 결코 자신의 본질을 건네주지 않기 때문에, 그 이끎은 동시에 이 열려 있는 상태 그 자체엔 이를 수 없음을 표명한다. 외부는 실제의 현존 -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대한 확신에 의해 내부로부터 조명되는 것- 으로 자신을 나타낼 수 없다. 단지 자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물러나, 마치 다시 만나는 일이 가능하기라도 하는양 사람들이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가 만드는 기호속에 함몰하는 부재로 나타날 수 있을 뿐이다. 열려 있음의 경탄할 만한 단순함 때문에, 이끎은 이끌린 자의 발 밑에서 무한정 열리는 공백 외엔, 마치 그가 거기 없기라도 한 듯 그를 맞아들이는 무관심 외엔, 저항하기엔 너무 강경하고 해독해내어 결정적인 해석을 가하기엔 너무 애매모호한 침묵외엔 아무것도 제공할 것이 없다. ...
이끎의 필수적인 상관물은 무심함 la negligence 이다. 양자의 관계는 복합적이다. 이끌릴 수 있으려면 인간은 무심해야한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해버리는, 그리고 자신의 과거, 가까운 친척들, 그런 식으로 외부로 내던져진 자신의 다른 삶 일체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본질적인 무심함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런 유의 무심함은 열중함 zele의, 모든 장애를 무릅쓰고 자신을 이끌림에 내맡기겠다는, 혹은 더 정확히는 (이끎엔 실증성이 없기 때문에) 공백 속에서 이끎 그 자체의 목적도 동기도 없는 움직임이 되려는 이 무언의, 정당화되지 않은, 끈질긴 몰두함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다. ...
그러나 이 열중함은 항상 깨어있는 걸까? 이것은 어떤 소홀함을 - 삶 전체, 과거의 온갖 애착, 모든 친척을 일체 아랑곳하지 않는 것과 비교해볼때 외관상으로는 더 사소해보이지만 훨씬 더 결정적인 소홀함을 범하지는 않는가? 이끌리는 인간을 쉼없이 나아가게하는 이 발걸음은 정녕 멍청함이나 오류가 아닌가? <나와 동행하지 않았던 자>와 <정해진 순간에>에서 여러차례 환기되었듯이 '그만해두면, 그 정도로 만족해선' 안되었을까? 이끎이, 자신의 은신처 깊숙한 곳에서, 물러나 있는 존재에게만 마지못해 말을 건네는 데 반해, 열중함의 본령은 자신의 고유한 근심거리로 난처해하는 것,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온갖 방안을 강구하는 것, 자신의 집요함에 열중하는 것, 이끄는 힘을 앞질러가는 것이 아닌가? 소홀한 것, 숨겨진 것이 어딘가에 있다고, 과거가 되돌아오리라고, 그러도록 되어있다고, 그것은 예기되고 보살펴지고 감시되고 있다고 믿는 것이 열중함의 본질이다. ...
열중함과 무심함을 무한히 뒤집을 수 잇는 두 모습으로 만드는 이 엄청난 불확실성의 근원은 틀림없이 '그 집을 지배하고 있는 무관심 incurie(아미나다브 p.235)' 속에 있다. 다른 모든 것들보다 더 눈에 띄고 더 은폐적이고 더 다의적이지만 더 근본적인 무심함. 이 무심함을 드러내는 모든 것들이 의도적인 기호로, 은밀한 집중으로 염탐으로, 책략으로 해독될 수 있다. : 어쩌면 게으른 하인들은 숨겨진 힘을 지니고 있는 지도, 어쩌면 주사위판은 오래 전부터 책들 속에 적혀 있는 제비를 나누어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선 열중함이 자신의 필요불가결한 그림자 부분인 무심함을 덮어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심함이 열중함을 숨기고 있다. : 무심함을 드러내거나 감출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무심함이 너무나 무관심한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에, 모든 동작이 무심함과 관련하여 기호의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 : 이끎의 기원은 무심함 자체가 매혹시킨 자를 맞아들이는 무심함과 완전히 일치한다. ; 무심함이 행사하는 구속력(이것이야말로 어째서 그것이 절대적인지, 그리고 어째서 절대적으로 비상호적인지의 이유이다.)은 단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구속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이 관계에 묶일 경우, 더 이상 순수하게 열려 있는 부름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순수하게 열려 있는 부름이 어찌 -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시간이 지나가고 되돌아오도록 내버려두고 사람들이 접근해오는 것도 내버려둠으로써- 본질적으로 무심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것은 무한한 외부에 있는데, 그 바깥엔 아무도 없는데, 그것이 내면성의 모든 형상을 순수한 분산 속에 해체시켜버리는데?
사람은 소홀한 만큼 부름받는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열중함이 소홀함을 개의치 않는 것, 자신 스스로가 대담하게 근심으로 화하는 것, 빛이란 결국 소홀함에 불과하다는 사실, 즉 빛이란 그것에 의해 이끌린 무심한 열중함을, 우리가 훅 불어 끄는 촛불처럼, 흩어버리는 밤과 등가를 이루는 순수한 외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까지는 어둠일랑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빛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가 되어야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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