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1월 20일 금요일

금요일 저녁과 푸쉬킨

사무실 창 밖을 내다보니, 나무 가지들이 휑한게 이제는 완연한 겨울이다. 가을이 빨리 지나버려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능. 다만 너무나 추워진 날씨 탓에 오들오들 떠는라 쓸데없는 지출이 많아지는게 안타까울 뿐이다. 만약 일년 내내 따뜻한 날씨 속에 살 수 있었더라면 내 옷 방의 2/3는 빈공간이였을 테고, 그랬더라면 난 아주아주 부-자로 살고 있을게다. 이건 허풍이 아니라 정말로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그래도 금요일 저녁인데, 퇴근 후 연구실로 향해 책이나 읽자니 왠지 쓸쓸하다. 습관의 기억이란 이래서 무서운 것이다. 이번주 내내 도선생님 발제를 준비중인데, 우연히 접하게 된 푸쉬킨의 시 몇 편 때문에 혀뿌리가 싸해져서, 가뜩이나 안써지는 발제문이 더 안써진다.

 

펼쳐두기..

   (모든 것이 끝났다, 1824)

 

펼쳐두기..

       (나는 당신을 사랑했소, 1829)

 

이 지극히 애도적인 유형의 시들 속의 눈에 띄는건 '사랑'보다도 '했다'이다. 당신을 사랑하는 마음이야 아직 약간은 남아있지만, 그 때문에 괴롭히지는 않을 것이란 고백은 겉으로 보기에는 다분히 이타적이고 희생적으로 보인다. (이 시들을 아무 생각 없던 예전에 읽었더라면 '도덕적으로 가장 숭고한 시'라는 세간의 평가에 나는 어느 정도 수긍했을 것이다.) 허나 (아직은 조금 남아있더라도) 다 꺼져가는 사랑 가지고 (희생하는 척) 선심을 베풀고 있는 것이라면, 푸쉬킨의 이 시들은 '도덕적으로 가장 추악한 시'이다. (단연코 지금 내게는 그렇게 보인다.)

 

하지만, '아직 다 꺼지지 않았는지도.'라는 시어의 뉘앙스에서 느껴지는 묘한 역설의 분위기를 부정할 수만은 없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으로 푸쉬킨의 시어들과 이리저리 놀다보니 또 하루가 갔다. <노름꾼>발제는 아직 야마도 못잡은 주제에 자꾸만 이렇게 샛길에서 놀아나니 이거 정말 큰일이다.

 

2009년 11월 16일 월요일

상처받은 사람들

도스토예프스키의 '상처받은 사람들'은 학대와 고통을 받는 이들의 내부에 꿈틀거리는 '구원자적 환상'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괴테의 '빌헬름마이스터 수업시대' 이후 정착되어 우리의 정신을 지배하고 있는 '아름다운 영혼'이란게 과연 말그대로 정말 아름다운가? 라는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쉽게 말해 한없이 희생적인 존재. 즉, 작품에서처럼 상대의 행복을 위해 떠나주는 '나타샤'라는 존재가 태어날 수 있게하는 근원적 원인이 무엇인가? 라는 의문을 만들었다는 말.

 

지젝은 이러한 희생적, 구원자적 태도에 대해 이 것은 주체가 (오만하게도) 마치 세상의 모든 비밀을 다 아는 양 삶을 받아들이는 방식이며 '나의 수난은 언젠가 보상받을 것'이라는 맹목적 믿음으로 현실을 살게 하는 동인이라고 설명했다고 한다. 구원자라는 환상의 내면에는 분명히 이러한 보상심리 -막연한 미래나 내세에 대한 거창한 믿음까지는 아니더라도- 가 자리잡고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해변의 여인'에서처럼 '문숙'(고현정)을 구원자라 인식하는 '중래'(김승우)는 어찌보면 상처받은 사람들이 꿈꾸는 가해자의 표본이다. 희생과 인내속에는 상대가 이 모든 고통을 인식하리라는. 그래서 언젠가는 뉘우치고 돌아와주거나, 최소한 후회라도 하기를 바라는 전혀 아름답지 못한 모순이 내재되어있다.

 

무엇이 버림받고 상처받은 이들에게 이러한 희생과 인내를 가능하게 하는가? 혹은 무의식이라는 형태를 통해 이를 강요하고 있는가? 낭만주의 사조의 도래? 기독교적 희생의 세뇌? 답은 역시나 뻔하다. 허나 문제의 본질은 내가 이 의문의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 아니 정확하게는 이 모든 정념을 외부에서 객관적으로 내려다보며 발꼬프스키공작처럼 한바탕 조소를 퍼붓지 못한다는데 있다. 분명히 '고통을 긍정하는 디오니소스적 인생'과 '스스로를 고통으로 내모는 구원자적 태도'의 사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단순히 고통을 즐기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고통과 상처에 대해 어떠한 답이 필요한가? 해답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모르는 척하며 고통속에 나를 옭아매고 무너져버리라고 부추기는 또다른 내가 소름끼치게 무섭다.

 

고통과 상처, 인내와 희생. 그리고 구원자. 아직 '죄와벌'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도스토예프스키의 이러한 물음들에 나는 벌써부터 바들바들 떨고있는 중인게다.

2009년 11월 13일 금요일

Sour Times - Portishead

가을밤은 깊어가는데, 나는 마치 처음 이사왔던 때마냥 방구석에 움크리고 앉아 하루종일 빈둥빈둥이다. 새로 산 마라톤화를 신고 근처나 한바퀴 뛰어볼까. 라는 생각도 잠시 해보았으나,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

 

사실 음악을 듣는 일조차 고통으로 느낄만큼 감수성이 예민해진 상태인데, 이런 때 듣는 포티쉐드는 물에 빠져 3분쯤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누군가 손에 쥐어주는 쥐약과 같은게다. '사람은 그저 살아가지 않으면 안된다'고 이야기하던 루쉰의 텍스트를 읽어놓아 참 다행이다.

 

ps. 그래도 뉴욕 오케스트라버젼은 경쾌해서 그나마 나아.

 

2009년 11월 12일 목요일

Sonata Tempest mvt.3 - Beetoven

 '내 피아노'란 놈이 생긴 이래로 그 위에 '베토벤 소나타2'가 항상 펼쳐져 있던 단 하나의 이유는 바로 이 곡 'Tempest' 3악장 때문이다. 우연히 어디선가 주워들은 이후, 변변한 레슨 한 번 없이 나는 이 곡만이 내 피아노 인생의 최종 목표인양 연습하곤했다. 때문에 내 모든 피아노 연습의 끝은 언제나 이 곡으로 (그것도 안단테 버젼으로!) 끝났다는 슬픈 이야기. (우리 이웃들은 어떻게 쟤는 20년 동안 같은 곡만 치고 있냐고 한숨지었을 것이 분명하다.)

 

 얼마전 본가를 방문해 피아노를 뚱땅거리다가 다시 악보를 펼쳐보았는데, (눈으로는 악보를 쫓아가지도 못한 반면) 손가락은 이 모든 선율을 기억하고 있는 신기한 현상을 체험. 무슨 기관없는 신체도 아닌데, 손가락이 내 의지나 기억과 상관없이 저절로 움직였던게다. '습관의 기억'이란 존재에 새삼스레 오싹해졌던 순간.

 

ps. 'Tempest'란 제목에서 짐작 가능(?)하듯, 이 곡은 베토벤이 셰익스피어의 태풍(The Tempest)를 읽고난 후 작곡한 곡이다. 그래도 명색이 영문과 출신인데, 20년동안 한 곡만을 연습하면서 새까맣게 몰랐다. ㅎ

 

2009년 11월 7일 토요일

이끎과 무심함 (미쉘푸코, '바깥의 사유')

아마도 욕망이 사드에게, 권력이 니체에게, 사고의 물질성이 아르토에게, 위반이 바타이유에게 차지하는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 블랑쇼에겐 이끎 l'attirance, 즉 순수하고 가장 적나라한 바깥의 경험이다. : 블랑쇼가 뜻하는 이끎은 그 어떤 매력에도 기대지 않고 그 어떤 고독도 마다하지 않으며, 여하한 실제적 교섭의 토대도 만들어주지 않는다. 이끌린다는 것은 외부의 유혹에 의해 초대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백과 벌거벗음 속에서 외부의 현존을 체험하는 것이며, 그 현존과 결합됨으로써, 우리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외부의 바깥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체험하는 것이다. 이끎은, 또 다른 내면성에게로 접근하라고 내면성을 부추기는 대신, 외부가 열린 채, 내밀함도 없이, 보호 장치도 없이, 아무 유보 없이(내면성을 지니지 않은채, 모든 폐쇄 장치 바깥에 무한히 펼쳐지는 외부가 어떻게 이런 것들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거역할 수 없게 표명한다 ; 그러나 외부가 결코 자신의 본질을 건네주지 않기 때문에, 그 이끎은 동시에 이 열려 있는 상태 그 자체엔 이를 수 없음을 표명한다. 외부는 실제의 현존 - 자신의 고유한 존재에 대한 확신에 의해 내부로부터 조명되는 것- 으로 자신을 나타낼 수 없다. 단지 자신으로부터 가장 멀리 물러나, 마치 다시 만나는 일이 가능하기라도 하는양 사람들이 그것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스스로가 만드는 기호속에 함몰하는 부재로 나타날 수 있을 뿐이다. 열려 있음의 경탄할 만한 단순함 때문에, 이끎은 이끌린 자의 발 밑에서 무한정 열리는 공백 외엔, 마치 그가 거기 없기라도 한 듯 그를 맞아들이는 무관심 외엔, 저항하기엔 너무 강경하고 해독해내어 결정적인 해석을 가하기엔 너무 애매모호한 침묵외엔 아무것도 제공할 것이 없다. ...

 

이끎의 필수적인 상관물은 무심함 la negligence 이다. 양자의 관계는 복합적이다. 이끌릴 수 있으려면 인간은 무심해야한다.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해버리는, 그리고 자신의 과거, 가까운 친척들, 그런 식으로 외부로 내던져진 자신의 다른 삶 일체를 존재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본질적인 무심함을 지니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상 이런 유의 무심함은 열중함 zele의, 모든 장애를 무릅쓰고 자신을 이끌림에 내맡기겠다는, 혹은 더 정확히는 (이끎엔 실증성이 없기 때문에) 공백 속에서 이끎 그 자체의 목적도 동기도 없는 움직임이 되려는 이 무언의, 정당화되지 않은, 끈질긴 몰두함의 또 다른 얼굴일 뿐이다. ...

 

그러나 이 열중함은 항상 깨어있는 걸까? 이것은 어떤 소홀함을 - 삶 전체, 과거의 온갖 애착, 모든 친척을 일체 아랑곳하지 않는 것과 비교해볼때 외관상으로는 더 사소해보이지만 훨씬 더 결정적인 소홀함을 범하지는 않는가? 이끌리는 인간을 쉼없이 나아가게하는 이 발걸음은 정녕 멍청함이나 오류가 아닌가? <나와 동행하지 않았던 자>와 <정해진 순간에>에서 여러차례 환기되었듯이 '그만해두면, 그 정도로 만족해선' 안되었을까? 이끎이, 자신의 은신처 깊숙한 곳에서, 물러나 있는 존재에게만 마지못해 말을 건네는 데 반해, 열중함의 본령은 자신의 고유한 근심거리로 난처해하는 것, 지나치게 걱정하는 것, 온갖 방안을 강구하는 것, 자신의 집요함에 열중하는 것, 이끄는 힘을 앞질러가는 것이 아닌가? 소홀한 것, 숨겨진 것이 어딘가에 있다고, 과거가 되돌아오리라고, 그러도록 되어있다고, 그것은 예기되고 보살펴지고 감시되고 있다고 믿는 것이 열중함의 본질이다.  ...

 

열중함과 무심함을 무한히 뒤집을 수 잇는 두 모습으로 만드는 이 엄청난 불확실성의 근원은 틀림없이 '그 집을 지배하고 있는 무관심 incurie(아미나다브 p.235)' 속에 있다. 다른 모든 것들보다 더 눈에 띄고 더 은폐적이고 더 다의적이지만 더 근본적인 무심함. 이 무심함을 드러내는 모든 것들이 의도적인 기호로, 은밀한 집중으로 염탐으로, 책략으로 해독될 수 있다. : 어쩌면 게으른 하인들은 숨겨진 힘을 지니고 있는 지도, 어쩌면 주사위판은 오래 전부터 책들 속에 적혀 있는 제비를 나누어주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선 열중함이 자신의 필요불가결한 그림자 부분인 무심함을 덮어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무심함이 열중함을 숨기고 있다. : 무심함을 드러내거나 감출 수 있는 것들에 대해 무심함이 너무나 무관심한 상태로 남아있기 때문에, 모든 동작이 무심함과 관련하여 기호의 가치를 갖게 되는 것이다. ... : 이끎의 기원은 무심함 자체가 매혹시킨 자를 맞아들이는 무심함과 완전히 일치한다. ; 무심함이 행사하는 구속력(이것이야말로 어째서 그것이 절대적인지, 그리고 어째서 절대적으로 비상호적인지의 이유이다.)은 단지 맹목적인 것이 아니다. ; 그러나 그것은 아무도 구속하지 않는다. 그 자신이 이 관계에 묶일 경우, 더 이상 순수하게 열려 있는 부름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순수하게 열려 있는 부름이 어찌 -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고, 시간이 지나가고 되돌아오도록 내버려두고 사람들이 접근해오는 것도 내버려둠으로써- 본질적으로 무심하지 않을 수 있으랴. 그것은 무한한 외부에 있는데, 그 바깥엔 아무도 없는데, 그것이 내면성의 모든 형상을 순수한 분산 속에 해체시켜버리는데?

 

사람은 소홀한 만큼 부름받는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열중함이 소홀함을 개의치 않는 것, 자신 스스로가 대담하게 근심으로 화하는 것, 빛이란 결국 소홀함에 불과하다는 사실, 즉 빛이란 그것에 의해 이끌린 무심한 열중함을, 우리가 훅 불어 끄는 촛불처럼, 흩어버리는 밤과 등가를 이루는 순수한 외부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순간까지는 어둠일랑 아랑곳하지 않은 채 빛을 향해 나아가는 행위가 되어야하는 이유이다.

감사.

요사이 나를 휘감고 있는 가장 큰 감정 중 하나는 다름아닌 '감사'이다. (감사합니다. 보다는 고맙습니다. 가 좋은 표현이라지만 '고맙'은 좀 이상하잖아요.ㅜ) 지독하게 유약해진 나에게 끊임없이 베푸는 모든 이들에게 정말로 고맙고 고맙다.

 

무엇보다 이중에서 가장 고마운 대상은 열번이고 백번이고 똑같은 책을 읽어주며 글을 익히게 해준 우리 부모일 것. 내가 만일 문맹이여서 도스토예프스키의 '상처받은 사람들'같은 글을 읽지 못했었더라면... 생각만해도 끔찍하다. 도선생님 세미나는 초창기 작품들을 모두 섭렵 후 중반기 작품들에 막 발을 내딛었다. 발전하는 그의 문체와 사상들에 내가 오히려 뿌듯해 어쩔 줄 모르겠다능...(하아. 이 건방진 태도는 무엇인가!)

 

다음으로는 절실히 필요했으나 어마어마한 몸값덕에 망설였던 중국어대사전을 자그만치 55%나 세일해 팔아준 헌책방님 되시겠다. 게다가 이미 한참 전에 절판된 루쉰의 잡문 전집과 아Q정전 원문. 거기에 다케우치 요시미의 평전까지 모두 다 구해놓은 상태. 그렇다. 루쉰의 원문텍스트와 전집 읽어내려가기를 동시에 진행해보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을유문화사의 소설집을 훑어보다 은근슬쩍 매료되버린 루쉰은 혁명과 그 과정에서 지식인의 좌절을 소설과 수필을 통해 예술로 승화시켰다. 진짜 '혁명적' 글쓰기가 궁금하다면 루쉰은 빼먹을 수 없는 작가인 것!

 

게다가 요 몇일 나를 정념의 늪에서 구원해준 블랑쇼의 저작들을 내친 김에 구할 수 있는 한 모조리 긁어모았는데, 워낙에 절판된 책들이 많아서 아직 몇 권이 더 남긴했다. 그린비출판사님들. 제발 어서 빨리 블랑쇼 저작선집을 완성해주소서! '문학의 공간' 읽고 싶어서 몇일을 초조해하고 있다. 블랑쇼 이해의 필수코스인 '푸코의 문학비평' 같은 책은 4500원짜리 정가인 것을 자그만치 만원씩이나 주고 득템! 당분간 내 침대에는 블랑쇼만 출입 허가닷!

 

비록 종교는 없으나 일요일 아침은 그래도 경건하게 무언가 생각을 정리하며 살아야하지 않을까. 라는 고민은 다음주부터 시작될 니체전작읽기 세미나로 말끔히 해소되었다. 때를 맞추어 '나를 알아보고' 새로이 로테이션된 커리큘럼에게 무한하게 감사를 올린다. 대략 한바퀴 돌려면 1년 반은 걸릴 대장정의 돌입. 하필이면 휑해진 주말에 맞추어 이런 기회를 잡다니, 이건 뭐. 운명이다.

 

그 외에 들뢰즈와 예술이란 테마로 음악,미술,영화,문학을 파트별로 접목시켜 1년간 연구할 프로젝트에 등록예정이고, 내년 1월엔 심보선, 조원규 작가들과 함께하는 모임에도 참가 예정이며, 맑스의 자본론 읽기는 당장 다음주 월욜부터 시작된다. 이 어마어마한 스케쥴에 정말 무한히 감사할 뿐이다. 일주일이 아주 그냥 꽉 차버렸네.

 

그런데도 당장 내일은 (텍스트들을 미리 땡겨 읽은터라) 너무너무 한가해져서 시네마테끄에서 상영되는 SF고전중의 고전인 '스페이스오딧세이' 예매를 해두었고, 20대 오빠들과 술자리도 약속해둔 상황. >.< 이렇게 정신없이 여기저기 감사하면서 이번 주도 잘 살아냈다. 혼자 지낸 주말이 이제 고작 2주째인데, 한 2년은 지난 것마냥 참 많은 일들이 있었고, 참 많이 성장했다.

 

 

2009년 11월 5일 목요일

이렇게 새로이 사랑은 시작되고.

(하이데거 식으로라면) 세상의 모든 '존재자'들이 내게서 등을 돌릴 때.

내 안의 (비인칭적) 자아가 죽음을 맞이했을 때.

실존의 본연이 의심스러워지는 '또다른 밤'을 맞이했을 때.

 

'볼 수 없는 것을 보라' 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라' 고.

이 지독한 역설을 향한 노력만이 진짜 예술이자, 예술적 삶이라고.

말하던 부분에서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고여버렸다.

 

 

 

2009년 11월 3일 화요일

오르페우스

에우리디케를 구하러 저승으로 들어간 오르페우스.

그리고 영원회귀의 운명.

 

더이상 에우리디케를 구하려 하지 않으리.

이따위 운명은 이제 그만 두어버릴래.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