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으로 오늘 숨죽여 우는 이여 그대 두 손의 흥
건한 피눈물보다 더 슬픈 진실은 사람이기 때문에 살
아가야 한다는 것
내일 또 밥 먹고 똥 누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
(기다린다는 것에 대하여, 문학과 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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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사이 읽고 있는 푸쉬킨의 "예브게니 오네긴"의 여주인공 타티아나의 어머니 '라린'을 소개하는 31연 중 한 구절이다.
<... 그녀는 누가 있거나 말거나 처음에는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곤 하다가 남편과 거의 이혼할 지경까지 가더니 얼마 후 차츰 살림에 재미를 붙이더니 그냥저냥 익숙해지고 만족하게 되었다.
습관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 그것은 행복의 대체물.>
한때 낭만주의 소설을 즐겨 읽고, 이와 같은 사랑을 꿈꾸며 소설의 주인공 같은 멋진 남자친구에게 사로잡히기도 하지만, 막상 결혼을 하고 나서는 이혼의 위기를 겪는 것도 잠시, 금새 일상의 습관들. 즉 하녀를 때리고 남편과 자식들을 길들이는 가운데 행복을 찾게되는 인물이 '라린 부인'이다.
그 어떤 절절한 서사보다도 강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일상의 힘. 숨쉬기도 힘들만큼의 격정적인 감정이 닥치더라도 '밥을 먹고 똥을 누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란 얼마나 비루한가. 하루하루가 잔반을 먹어치워야하는 지리한 식사처럼 꾸역꾸역 사는 것이라 느껴질 때가 있다. 생生이란 정념의 고통들을 견디어 내며 수도修道하는 행위라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하며 버티다가도, 어느새 '일상'이라는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강력한 진정제 앞에 굴복해버리고 마는 치사한 과정의 연속.
흔히 사람들은 그깟 감정들이란 다 일시적인 것일 뿐이라고. 어서 정념들을 정리하고 일상으로 돌아가면 편안해질 것이라고들 위로하곤 한다. 이들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상처받은 사람들'속 주인공들. 즉, 감정의 늪에서 벗어나길 거부하며 스스로를 더욱 학대하고 있는 인물들을 비판하며, 그렇게 힘들게 살 필요가 있는가. 라고 질문을 던진다. 네가 아직 어려서. 혹은 사랑을 모르기에. 라며 훈계 아닌 훈계를 늘어놓기도 한다.
감정의 경험들을 안주 삼아, 훗날 비슷한 고민을 하는 누군가에게 <한때 나도 다 겪어보았지. 삶이란게 다 그런 것이란다.>따위의 폭력적인 메타를 행사하지 않기위해서라도. 나는 평범하게 흐를 일상을 전투적으로 거부해야할 당위를 되내이게 되는 것이다. 남편과 자식들을 길들이면서 재산을 불려나가는 가운데 행복을 찾는 그렇고 그런 일상 속에서, <행복이란 먼 곳에 있는게 아니야. 딱 이만큼. 평범한 일상이 행복이지>로 자위하는 삶을 살기에 단 한번뿐일 내 삶이 안쓰럽기 때문이다. 그 과정이 얼마나 애절하든, 얼마나 고통스럽든 개의치않고 사랑과 (비일상적인)삶을 지속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낭만주의의 경계 밖에서 이 모든 메타포를 우습고 치기어리다며 비판해서는 안되는 이유 역시 여기에 있는 것이다. 까닭에 ('영원'이란 단어를 쓰는 일이란 것이 어느만큼의 용기를 필요로하는 일인지 잘 알고 있지만,) 영-원-히 낭만주의적 망령에 휩싸인 채로 살아가고 싶다고 소망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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