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29일 토요일

Skunk anansie - Charlie Big Potato

 

 

"오르가즘 후의 허무(Post Orgasimic Chill)"

 

 

 오늘은 락밴드 역사상(?) 가장 마이너했기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풍겼던 뮤지션, 스컹크 아난시 (Skunk Anansie)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오르가즘 후의 허무(Post Orgasimic Chill)". 이 놀랍도록 섹시한(?) 앨범의 타이틀이 99년 음악잡지 '핫뮤직'에서 처음 언급되었을 때만 해도, 난 이들이 그저 90년대 한창 봇물터지듯 흘러나오던, 다분히 퇴폐적인 밴드중 하나일 꺼라 섣불리 짐작했었다. 헌데 보컬 '스킨'의 프로필을 보아하니, 반나치주의 운동과 동성 연애 지지 운동에 투신했던 경력이 눈에 띠었다. 게다가 이 여자, 누가봐도 소울(soul)스럽다 싶은 음색으로 무장한 '흑인 락 여성 보컬리스트'였던 것. 백인 남성들의 전유물에 가까운 락 음반 시장에서 일단 비쥬얼(?)부터 색다른 이 밴드, 지극히 다의적인 의미를 띄는 가사들도 그렇고, 도무지 장르를 규정할 수 없는 사운드도 그렇고, 뭔가 심상치 않아보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온갖 '마이너'한 요소들로 무장한 '전사'의 이미지가 풍겼던 것.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은 위의 앨범, 3집 'Post Orgasmic Chill'을 끝으로 해체의 길을 걷게된다. 94년, 백인 남성 위주의 브릿팝이 한창 절정이던 런던에서 결성되어, 한때는 이름이 꽤 알려진 영국의 음악 잡지 '커랭(kerrang)'에서 'Best British Band'부문에 노미네이트 될 정도로 잘나가던 밴드였음에도, 마치 앨범의 타이틀 마냥 2001년 돌연 해체해버린 것이다. 이유는 다름아닌 지나친 '상업화'의 휴유증때문이었다. 이후 보컬 '스킨'은 재기를 노리고 머리카락까지 기르며 달달한(?) 목소리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지만, 대중들에게 이전만큼의 큰 반향은 일으키지 못한다.

 

 

 대중음악이 온전히 정치적일 수 있을까

 

 

 사실 이러한 수순을 밟은 뮤지션들이 어디 이들뿐이랴. "Killing in the name" 같은 정치적 선전 문구로 9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Rage against the machine) 같은 밴드 조차, 국내 내한공연에서 수익성이 없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돌아갔다는 사실로 미루어볼때, 상업화를 온전히 배재한 '정치적'인 대중음악이란게 어느 수준까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 인지도가 올라가고 자신들의 음악을 '메이져'한 대형 음반사에서 관리하게 되면서부터, 대부분의 모든 락밴드는 본연의 '마이너'함을 잃을 수 밖에 없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내가 블랙 레즈비언이기에 'Shut up'하라 강요할 수 없다'고 외치던 '스킨'의 목소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 외쳐지는 순간부터 자본의 또다른 상품이 되어버렸다.

 

 

 어디 음악만 그러하겠는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것'이 시詩라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여지는 순간' 시도 그 힘을 잃게 될지 모른다.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게 된 순간' 이들 역시 더이상 그것이 애초에 지향하던 순수함을 잃게 되었던 것처럼. 그러나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보여주려는' 노력이 바로 정치성이라면, 그것도 세장 모든 '마이너'들의 정치적 동력이라면? '잃어버린 시구를 찾아 오늘도 나는 거리에 나선다'던 스페인의 시인 로르카의 말처럼, 끊임없이 '보려는' 그리고 '들리게하려는' 노력 안에서 락, 그리고 대중음악의 정치성을 다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른바 '뜬' 뮤지션들이 '상업화의 후유증'과 '분출된 정치적 힘' 사이에서 헤매야 했던 그 고민은 가볍지 않은 것일 게다. 최근 Skunk Anansie의 재결합 소식이 들려오던데, 이들이 그간의 공백을 깨고 얼마나 '들리게 하려는' 노력으로 무장했을지, 사뭇 기대가 되기도 한다.

 

 

찰리네 큰 감자

 

 이번 선곡은 Post Orgasmic Chill 앨범의 첫번째 싱글발표곡, 'Charlie Big Potato'이다. '찰리의 꿈'으로 대표되는 지배계급과 언론의 세뇌에 맞서 '그 추악한 진실을 밝혀라'고 외치는 곡이다.  TV만 틀었다하면 되풀이되는 '북한 + 천안함' 관련 보도를 듣고 있자니, 요사이 특히 이 곡의 의미가 좀 더 절절해진다.

 

 

 선거의 시작에 때 맞추어 발표된, 일명 '파란 매직 1번'의 천안함 사태 진상조사 결과를 두고, 처음엔 그 발상 자체의 어이없음에 한바탕 실소를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한 편의 저질 코메디같은 시나리오에 과연 누가 세뇌되고 누가 동요하랴 싶기까지 했던 것. 하지만 문제는 정부의 이같은 책략에 소위 보수 언론들의 해괴망측한 상상력이 덧붙여지면서, 이들이 의도한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천안함 조사를 불신하는 사람은 친북좌파이거나 원천적 안티세력'이라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고, 언론은 '국민이 3일만 참으면, 전쟁도 해볼만하다'라는 투로 위협을 가하고 있다. 단순히 '이런 식으로 큰 웃음 주지는 마시라고' 하기엔, 사태가 심상치 않아보인다. 주가가 폭락했고, 환율마저 치솟았으며, 외환 투기의 기미마저 나타나고 있다. 선거 관련 여론조사에서 천안함 발표전까지만 해도 주춤했던 기존 세력의 지지율이 다시 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흐르는 강의 물 길을 틀어막고, 그 강에서 살고 있던 수많은 생명들에 대해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하며, '이것이 녹색성장'이다 외치는 정부. 그들의 해괴한 논리는 천안함 사태에서도 되풀이 되고 있다. 보고있자면 기분이 무척이나 더러워지는 저 기묘한 요술들을 텔레비젼 전원을 끄듯 꺼버리고 싶어지는 요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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