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9일 일요일

공정한 소비라는 환상

 

 

시작하며

 

신문을 보니까 우리보고 좌파라고 하대예. 나는 좌파가 김일성 찬양하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참 이상하네' 싶었지예. 마, 내가 옥쇄파업 때문에 평택에 올라왔다는 소식이 알려지니까 친척들이 다 전화를 해쌓는기라. '거기 좌파에 세뇌되면 우짜노'하고 걱정하대예. 허 참, 언론이 무섭긴 무섭네예.

6월, 도화선 될지 모를 쌍용차...中 / 프레시안 (2009. 6. 10)

 

사실 요 몇 년 사이, 대한민국 곳곳에 이렇게나 좌파가 많았나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많은 이들이 보수 언론 내지는 수구 세력에 의해 좌파 혹은 빨갱이로 지목되었다. 비단, 용산범대위나 쌍용차노조뿐 아니라, 노사모까지 범좌파단체로 규정되는 현실이다. 하지만, ‘좌파로서 살기’이란 결코 녹녹치 않은 일이다. 편의점에서 우유를 하나 집으려 해도, 이내 머릿속엔 공장형 축산 시스템이 지닌 폭력성이 떠오르고, 커피 한 잔 사 마시려 하면, 제3세계에서 싼 값에 착취당하는 어린 노동력이 떠오른다. 그까짓께 뭐 그리 대수이겠냐고 중요치 않게 생각했던 일상의 대부분의 것들은 사실 누군가 흘리는 피고름의 산물이다. 그것이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품위를 지킬 줄 아는 좌파로 사는 것은 어렵다.

 

 

공정 무역, 착한 소비의 등장

 

남자친구에게 선물할 초콜릿을 사기 위해 발품을 판 박oo씨(22.대학생)는 “잡지와 인터넷을 통해 공정무역 초콜릿의 존재를 알게 됐다”면서 “맛도 좋고 유기농이라 더욱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시중에 판매되는 일반 고급 브랜드 초콜릿 값과 별반 차이가 없다”면서 “무엇보다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는데 한 몫 거들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 한 구석이 뿌듯하다”고 덧붙였다.

발렌타인데이 ‘착한’ 사랑고백이 뜬다 / 경향신문 (2009. 2.11)

 

 ‘공정무역 초콜릿’이란 상품이 작년, 진보 언론의 기사를 시작으로 화제가 됐다. 나 같은 고민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일까. 발렌타인데이에 공정무역 초콜릿 선물하기 열풍은 올해 역시 이어져, 대형 인터넷 쇼핑몰 뿐 아니라 국내 주요 백화점에서까지 공정무역 초콜릿이 판매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지난 해 밸런타인데이가 있은 2월 한 달 동안 우리 쇼핑몰의 매출액은 390만 원이었다. (기존의) 일 년 동안 우리의 월 평균 매출액은 170여만 원이었다. (......)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지난 2주 동안 주문이 물밀듯이 쇄도하였다. 그동안 하루 서너 건에 불과했던 주문이 하루 1백 건, 2백 건 씩 들어와 초콜릿이 동 날 정도였다. 하루 매출액이 지난 해 한 달 또는 두 달 매출액에 다 달았다. 구멍가게에서 갑자기 중소기업이 되는 듯 했다.

 

 ‘착한 초콜릿’ 대박으로 돈은 얼마나 벌었을까? / 박창순, 공정무역 울림

 

 

이번 설문조사에서도 공정무역 제품 구매 이유로 '소비를 통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45.6%), '근본적인 취지가 좋아서'(44.5%), '주로 친환경 제품이라서'(12.9%) 순으로 응답했다.

 

최고 인기 공정무역 제품 / 한국경제 (2009. 5.15)

발렌타인데이를 앞두고, 초콜릿을 구매하고자 했던 많은 이들에게 ‘공정무역 초콜릿’이란 그동안의 윤리적 고민을 덜어주는 대안 상품으로 등장했다. 주는 이도, 받는 이도 더 이상 초콜릿이 지니는 시초의 폭력성에 대한 죄책감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었다. 공정 무역 초콜릿이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윤리적 만족감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공정무역은 1946년. 미국 Ten Thousand Villages에서 푸에르토리코의 바느질 제품과 1950년대 후반 영국 Oxfam 가게에서 중국 피난민에 의해 만들어진 공예품 판매하게 되면서 시작됐다. 1960년대 들어 공정무역 조직이 결성되었고, 제3세계의 빈곤문제가 심화되면서 하나의 시민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대안(Alternative) 혹은 공정(Fair) 무역이라 불리는 이러한 소비운동의 확산은 애초부터 도움이 아닌 거래(Trade, not Aid)를 모토로 내세웠다.

 

하루 단 $1가 없어 굶주리며 아기들을 업고 구걸하며 살아가는 무기력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회적인 구호물자뿐 아니라, 적정한 근로수당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일자리이며, 지속적인 교육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빈곤의 대물림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경제적으로 소외 받고 있는 제3세계의 어려운 사람들의 경제적인 자립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방식의 무역이 바로 '공정무역'입니다. 공정무역은 현재 전 세계의 많은 시민들과 단체들의 호응 속에서 기존의 경제구조에서 밖으로 밀려나있던 사람들에게 교육과 일자리를 제공하고 환경 친화적인 방식으로 상품을 생산 관리하며, 생산자들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삶’을 고려한 근로조건 및 임금을 제공함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보다 윤리적이고 지속 가능하도록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공정무역이란? / 한국공정무역연합

 

 

공정무역은 과연 공정할까?

 

‘공정 무역’, 그리고 '공정'의 개념과 범위는 막연하다. 무역에서 '공정'이라는 개념은 기존의 '불공정'한 유통과정, 즉 합리적인 노동의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 형태의 상품 거래, 자본의 규모와 그 자본이 소유한 유통망의 확장성 등을 앞세워 일방적으로 이익을 뽑아내는 방식을 벗어난 모든 형태를 말한다. 여기서 '공정 무역'이란 '개인적 소비로 거래되는 제품들 중 공정한 거래 과정을 거쳐 판매되는 상품들'로 한정지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공정무역을 통해 거래되는 상품 역시 소비를 전제로 한다. 공정무역이란 단어는 '공정' 외에 '소비'라는 개념 역시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중성을 지니는 것이다. ‘공정’이라는 개념은 이분법적으로 쉽게 나눌 수 없는 일종의 추상 명사이다. 어디까지가 공정하고 어디까지가 공정하지 않은지, 이를 측정할 척도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비해 ‘소비’라는 행위는 그 과정 자체가 자본의 추동력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비교적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개념이다. 맑스는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를 ‘남의 부副를 창조하는 힘을 생산하는 것’이라 보았다.(p.779) 소비란 노동자의 유지와 재생산을 보장하는 한편으로 그들의 생활수단을 끊임없이 소멸시킴으로써 노동과정 밖에서까지도 노동자를 자본의 부속물일 수 밖에 없게 하는, (노예의)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다.

 

‘공정’이란 개념이 ‘소비’와 접목되면서, 전자가 후자의 원죄를 사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즉, 윤리적 만족감을 선사하는 소비가 이루어진다는 데서, 공정 무역 상품의 소비라는 행위가 지닌 모순이 드러난다.

 

자본론 제8편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태생이 다분히 폭력적인 자본을 지탱하게 하는 소비란, 그렇다면 애초에 과연 맑스 식으로라면 공정해질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공정한 과정을 거쳐 생산되었다는 초콜릿을 구매하는 또다른 노동자의 화폐가 결국 자본이 변질시킨 기념일 중 하나인 발렌타인데이를 기리기 위해 소비된 것이라면, 이를 과연 공정하다고 볼 수 있을까? 제3세계 어린이들을 부당하게 착취하지 않고 생산해낸 축구공으로 월드컵이 치루어진다면, 이 상업적인 행사는 과연 공정해질 수 있는 것일까?

 

 

이른바, 시초축적

 

분명히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호 상품 위주의) 소비문화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되풀이되고 있는 자본의 부당행위를 제재할 효과적인 제어 장치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자칫 공정한 소비만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항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몸집이 작다는 이유로 고용되어 수많은 굴뚝에서 소리 없이 죽어갔던 어린 생명들의 피눈물로 탄생된, 자본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소비’라는 행위의 근본을 망각한 채, ‘지금’의 선한 의도만으로 '공정'하다 포장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농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아 양들에게 내어주고, 그들을 부랑자 혹은 임노동자로 비참하게 살게 했던 자본의 탄생과, 제3세계로의 식민 지배 과정에서 전파된 커피와 카카오 같은 기호식품의 세계적 확산. 이들의 시작은 그 근원이 폭력적이였다는데서 분명히 공통의 분모를 지닌다.

 

자본의 축적은 잉여가치를 전제하며, 잉여가치는 자본주의적 생산을 전제하며, 자본주의적 생산은 상품생산자들의 수중에 상당한 양의 자본과 노동력이 이용 가능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이 모든 운동은 끝없는 순환 속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데, 여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본주의적 축적에 선행하는 시초축적,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결과가 아니라 그의 출발점인 축적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본론 1 p.979)

 

 

 

 

 

 

 

 

 

 

 

 

 

 

 

 

 

 

커피값 중 농민 수입을 두배로…맛과 향은 그대로 中 (한겨례/ 2006.9.1)

 

기사의 그래프로, 커피 생산 농민의 수익은 공정무역상품으로 거래시, 0.5%에서 6%로 상승함을 알 수 있다.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일반 커피 한 잔의 가격을 5천원으로 산정시, 25원에서 300원으로 농민의 수익은 증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거래되는 공정무역커피는 5.5%만큼의 가격인상분만을 반영해 거래되고 있는가?

 

그 아무리 공정한 거래를 통해 생산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임금이 지급된다해도, 자본이 자신의 유지에 필수적인 잉여가치까지 그들에게 건네주는 것이 아님은 분명해보인다. 공정무역거래제품이 일반 생산 제품에 비해 가격이 높은 대부분의 이유는, 해당 생산과정의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 임금지불비용의 추가에 기인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자본의 잉여가치에의 희생이 아닌, 대다수의 소비자, 즉 노동자가 다른 노동자의 임금의 추가분을 부담하고 있는 셈이다.

 

노동자계급의 개인적 소비는 노동력과의 교환으로 자본이 양도한 생활수단을 ‘자본이 다시 착취할 수 있는 새로운 노동력'으로 재전환시키는 것에 불과하다(자본론 1 p.777)

 

 

상품으로 변질된 '공정무역'이라는 '브랜드'의 함의

 

자본의 흐름에 주목하여 부당행위를 축출하고자 하는 공정 무역 상품의 소비의 확산은, 이제껏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잉여가치를 뽑아내는 것' 만이 목표이던 자본가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의 실행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 ‘도덕적’ 가치는 위에서 살펴본 실질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본에게는 ‘위협’으로 느껴지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러한 공정 제품 시장이 확대될수록, 공정한 소비를 하려는 구매자들이 지지하는 '선한' 의지를 반영하고자 하는 기업 역시 시장원리에 의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가가 잉여가치의 생산과정에서 저지르는 부당행위를 강제적인 규제가 아닌 시장의 원리에 의해 최소화할 수 있게 하는데 있어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다. 실제로 스타벅스 같은 거대 기업까지 최근 들어 공정무역으로 생산된 커피를 사용한다고 광고하고 있는 것에서 그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스타벅스 커피 원두의 구매원칙(perchasing Guidelines)

 

A. 품질(Quality)

: 모든 커피 원두는 사업의 필수요소, 즉 스타벅스만의 높은 품질기준을 만족시키는 원두만을 구매합니다.

B. 환경(Environment)

: 커피는 반드시 생태계 보호에 기여하여야 하며,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적은 방법이어야 합니다.

C. 사회(Social)

: 근로자들의 임금과 수당은 반드시 그가 속한 지역 및 법이 요구하는 것에 부합하거나 혹은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또한, 근로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하고, 적절한 생활조건을 제공하기 위한 효과적인 조치를 강구해야 합니다.

D. 경제(Economic)

: 커피 재배는 반드시 재배자들의 수익을 극대화하며,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기반시설과 공공 서비스를 강화함으로써 지역 사회에 이익을 주어야 합니다.

 

스타벅스코리아 홍보자료

 

한국공정무역연합이 제시하는 ‘공정 무역’ 대 원칙과 다를 것이 없다. 스타벅스 역시 다른 공정무역커피업체와 마찬가지로 일반 가격의 두 배를 치르고 원두를 구입한다. ‘근로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하고, 적절한 생활조건을 제공하기 위한 효과적인 조치’를 강구할 수 있을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타벅스 역시 공정한 기업일까? 실제로 공정무역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는 상품의 가격과 그 효과를 생각할 때, 답은 명백하다. 농민에게 5.5%를 더 쥐어주고, 실제 소비자에게는 그 이상을 챙기는 자본의 또다른 마케팅 방법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본은 이미 ‘공정한 소비’라는 환상을 상품화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자본의 굴레를 벗어나 보려는 이들에게까지, ‘공정’은 ‘소비’라는 행위 자체의 부당성을 감추는 효과를 보여주는 것이고. 우리의 자본가들은 이를 또 다른 하나의 상업적인 가치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본의 ‘이른바 시초축적’이라는 공정하지 못한 원죄를 망각하게 만드는 ‘공정한 소비라는 환상’은, 자본, 자본주의를 유지하게 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합리화하게까지 만드는 일종의 방어기제로 작용할 위험성을 지닌다. 그리고 그것은 ‘스타벅스’의 사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스타벅스는 그 방어기제를 가장 ‘자본주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회사인 셈이다. 공정무역이 거대 자본에 의해 이용되면 공정무역 마크가 붙은 각종 커피와 초콜릿, 여행상품들은 윤리적 만족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환상이 된다.

 

 

맺으며

 

원죄의 멍에를 지고 있는 인간들의 세상은 늘 혼란스럽고 불완전하니 모순된 이해관계를 가진 인간들의 갈등을 봉합해나가면서 사회 전체를 통섭하기 위해 강력한 국가와 교회가 필요하다. 유한한 인간은 그 제한된 이성으로 무한한 세계나 우주의 비결을 이해할 수 없으니 이성보다 전통, 전례, 여태까지 해온 방식 등이 먼저다. 불평등한 사유재산제가 없어지면 인간들이 게을러질 것이니 평등은 망상이다. 이성에 기반한 이상보다 현실은 먼저고, 좋을지 나쁠지 알 수 없는 변화보다 현상의 기본적 유지가 먼저다.(에드먼드 버크)

 

흔히, 보수가 좌파를 공격할 때 주로 쓰는 무기란 다름아닌 ‘현실성’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다른 대안이 제시해보라고, 그들은 묻는다. '공정무역'이 '현실'을 인정하고 출발한 '덜 자본주의적'인 개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성'이 가진 모순 자체를 숨기는 도깨비 감투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페르세우스는 괴물을 추격하기 위해 도깨비감투를 써야 했지만, 우리는 괴물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 위해 도깨비 감투를 눈과 귀밑까지 깊이 눌러쓰고 있다.

 

우리의 상태에 대해 우리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자본론 1 p.5)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해야 한다는 명제는 자본주의 사회를 인정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종의 '원죄'다. 어쩌면 공정무역이라는 개념은 현실을 붕괴시키지 않으려는 자본주의적 '시뮬라크르'가 만들어낸 치료제일 수 있다. 일종의 '아편' 효과다. 그러나 '스타벅스'의 사례에서 보듯, 자본주의의 '치료제'가 브랜드화 돼 상품 그 자체로 활용되는 것은 치유제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됨을 뜻한다. 사람들이 이제 '공정무역' 커피가 아니라 '공정무역' 자체를 소비하게 되기 때문이다.

 

공정무역의 '상품화'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가장 시급한 작업은 '상품'으로써의 공정무역과 '운동'으로써의 공정무역을 분리해내는 일이다. 이후 공정무역이 어떻게 하면 더 공정하게 진행될 수 있느냐 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공정무역이 갖는 의미는 제 3세계의 노동자에게 정당한 이익을 돌려줄 수 있느냐 하는 것 이상의 무엇이다. 공정무역의 등장은 그 동안의 무역, 상품 거래가 얼마나 불공정했는지, 사유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됐다. 공정무역이라는 개념의 등장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체제 자체가 가진 모순을 치유할 방법을 모색하는 일은 '자본'이 갖는 속성을 간파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정무역은 그런 근원적 고민 속에서 이뤄진 산물이다. 우린 공정 무역의 시스템을 통해 상품이 어떻게 거래되는지, 또 어떻게 소비되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일종의 '매개'이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일종의 '열쇠'다. 거기에 맞는 열쇠 구멍을 찾아내는 일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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