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신 전의 그레고르 vs 외출 전의 ‘나’
어느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의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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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변신>은 주인공 그레고르가 이미 벌레로 변신되어있는 상황에서부터 시작된다. 벌레로 변한 자신을 보고서야 비로소 그레고르는 변신 전의 자신을 돌이켜본다.
‘아아! 이렇게도 힘든 직업을 택하다니. 매일같이 여행이다. 이일은 회사에서 하는 실질적인 일보다 훨씬 더 신경을 자극시킨다. 그 밖에 여행하는 고역이 있고, 기차 연결에 대해 늘 걱정해야 하며, 식사는 불규칙적이면서 나쁘고, 대하는 사람들은 항상 바뀌고 따라서 그들과의 인간 관계는 절대로 지속적일 수 없으며 또한 진실한 것일수도 없다. 이 모든걸 학마가 가져갔으면!’
‘(...) 그러면 당장에 쫓겨날거야. 하지만 쫓겨나는게 나에게 좋을지는 몰라. 부모님 때문에 망설이긴 했지만, 그렇지만 않다면야 벌써 오래 전에 사표를 냈을 거야.’(110)
그레고르는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인한 빚은 물론, 한 가정의 가장의 역할까지 떠맡은 인물로서 외판원이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다. 보통 세일즈 맨이라 함은 늘 반기지도 않는 사람들을 찾아다니고 또한 대상이 항상 바뀌어 사람들과 지속된 관계를 유지하지 못한채, 진심에서 우러나지 않은 거짓의 인간관계를 맺으며 활동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가족에게 아들로서 그리고 오빠로서 존재하기보다는 단순히 돈을 벌어다주는 직장인이었고, 회사에서는 매상을 올리는 데 필요한 도구일 뿐이다. 한 가정의 선량한 아들이자, 사회적으로는 모범적인 그이지만, 이는 그의 존재가 가족을 위한, 사회를 위한 존재이고 자기 자신을 위한 존재가 아님을 역으로 증명한다. 돈과 노동에 의해 소외된 존재. 또한 그레고르는 평소에도 문을 잠그는 습관이 있을만큼, 가족들과의 단절, 즉 사회 안에 소속되기 거부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 애는 머리 속에 회사일 밖에 없어요. 저녁에도 외출하는 일이 없어서 제가 오히려 화가 날 지경이에요. 벌써 일주일째 이 곳에 있으면서도 매일 저녁을 집에서 보내고 있어요. 우리와 함께 식탁에 앉아서 조용히 신문을 보거나 기차 시간표를 조사해보지요. (117)
이 대목에서 떠오르는 또다른 소설이 있다. 다름아닌 이상의 <날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로 시작되는 이 소설은 카프카의 ‘벌레’라는 단어와 마찬가지로 ‘박제’라는 단어로 시선을 끈다. 독자는 이미 ‘벌레’와 ‘박제’라는 단어만으로도 그레고르와 ‘나’의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벌레와 박제 모두 우리로 하여금 우선은 인상을 찌푸리게 하며,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하는 외면을 지니는 공통의 상징물이다. 이상의 <날개>에서의 ‘나’를 연관지어 생각해보면 ‘나’는 박제된 동물처럼 사고력과 행동력을 상실한 무기력한 모습으로 나타나며 바깥 세상은 물론 가정에서도 고립되어 타인과 인간관계를 맺은 사회적 존재로서 살지 못하고, 심지어 가정에서 아내와도 소통이 단절되어 있는 것이다.
아내에게 직업이 있었던가? 나는 아내의 직업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만일 아내에게 직업이 없었다면, 같이 직업이 없는 나처럼 외출할 필요가 생기지 않을 것인데- 아내는 외출한다. 외출할 뿐만 아니라 내객이 많다. 아내에게 내객이 많은 날은 나는 온종일 내 방에서 이불을 쓰고 누워 있어야만 된다.
나는 그러나 그들의 아무와도 놀지 않는다. 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사도 않는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나’는 태어나면서부터 박제였던 것이 아니고, 일상의 세계, 상식의 세계, 의식의 세계를 두루두루 완전하게 거치고 난 뒤 현실도피자로서의 박제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나’는 실존적 존재자로서는 만족할 수 없고, 무미건조하고 급속한 변화를 하고 있는 지구가 허망하다고 인식한다.
나는 내가 지구 위에 살며 내가 이렇게 살고 있는 지구가 질풍신뢰의 속력으로 광대무변의 공간을 달리고 있다는 것을 생각했을 때 참 허망하였다. 나는 이렇게 부지런한 지구 위에서는 현기증도 날 것 같고 해서 한시바삐 내려 버리고 싶었다.
이러한 인식은 ‘나’ 역시 의식추구로서의 가치인식 체계가 어떤 선택권 앞에 행동할 수 없는 거세된 행동의 표현으로써 본래적인 자아를 상실한 상태임을 나타낸다. <변신>의 그레고르나 <날개>의 ‘나’는 본래적인 자아의 상실로 인한, ‘자기로부터의 소외’된 인간이라는 점에서 매우 유사해보인다.
변신 후의 그레고르 vs 외출 후의 ‘나’
그레고르는 가족에게 경제적 도움이 되는 부양인이자, 회사에서는 성실히 일하는 노동자이다. 하지만 그의 갑작스런 변신으로 인해 상황은 뒤집힌다. <변신>의 첫 문장의 ‘불안한 꿈’은 그가 변신하게 된 발단이다. 어느날 갑자기 다족류의 벌레로의 변신. “나머지 몸뚱이 크기에 비해 비참할 정도로 가느다란 다리가 눈앞에서 힘없이 흔들거리고 있는(109)” 상태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고객을 상대해야만 했던 외판원인 그레고르의 현실을 묘사한다. 그레고르는 여러개의 발의 허우적거림을 보면서 마음 속 깊이 숨기고 있던 직업에 대한 혐오와 힘든 노역에 대한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한 것이다. 반복되는 일상과 무거운 현존에서 탈피하고 싶다는 잠재의식이 그의 변신의 원인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레고르의 하소연은 아주 잠시. 그는 다시 자신의 변신을 무시한 채 출근을 걱정하며 몸을 일으키려 한다. 직면한 현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채, 그레고르는 어떤 의미에서는 변신이란 진정한 실존의 길로 갈 수 있는 가능성을 외면하고, 인간이라는 비참했던 일상으로 되돌아가려는 의지를 보인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했음에도, 이를 인정하지 않은채 출근을 걱정한건, 방에서 나오지 않는 그레고르를 걱정하던 가족들 때문이었다. 그는 이때까지 가족을 위해 일해왔다. 자신에게서 소외된 채 가장으로서의 위치와 노동자로서의 역할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한가지 관심을 끄는 것은 <변신>에서 그레고르의 소외현상이 변신 후 방문이 열림과 동시에 다른 양상으로 진행된다는 점이다. 가족들은 그의 변신을 알기 전까지만해도 어떻게 해서든 그레고르를 도우려 했으며 이 때문에 그는 자신이 여전히 외판원이자 가장으로서 가치 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가족들에게 그의 변신을 드러내기 이전의 그에게는 일상적인 자아로서의 의식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그러나 문의 열림으로 인해 그의 이제까지의 의식은 완전히 뒤엎어진다. 그레고르의 방문 안의 세계는 본래적 자아의 세계되어버리고, 방문 바깥의 세계가 일상적 자아의 세계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는 <날개>에서의 ‘나’의 방과 아내의 방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나’의 방은 그레고르의 방과 마찬가지로 본래적 자아의 세계를 상징하는 공간이고, 아내의 방은 일상적 자아를 상징한다.
그레고르는 회사에 늦게까지 출근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찾아온 지배인의 말에 의해 자신이 노동행위로부터 소외되어있음을 발견한다.
그렇지만 더 말씀드리자면 우리들 사업하는 사람들은 행인지 불행인지 몸이 약간 부편한 것은 사업을 고려해서 참고 넘겨야만 하지요.(117)
당신 편이 되어 얘기해줄 생각이 없어지고 말아요. 그리고 당신의 지위도 전혀 확고부동한 것이 아닙니다. (...) 장사가 안되는 계절이란 원래 없는 법이고 있어서도 안되지요.(119)
그동안 직장을 위해 성실히 일하였기에 자신의 위치가 보장되어있다고 확신했던 그레고르에게 이러한 질책은 너무나 비인간적이다. 회사는 오로지 이익을 얻기 위해 인간을 부품처럼 부리는 도구로 이용하고 있었음이 드러난 것이다. 경제적 수단으로서 이용가치가 없다면, 언제든 해고될 수 있는 존재. 매일같이 자명종에 의지하여 반복적으로 생활을 하고 집에서조차 업무에 관한 생각에 가득차 인간이 아닌 고용자로서 살아온 그레고르는 그동안 인격을 가진 주체자로서의 삶이 아닌, 물질적 존재자로서의 대상으로 살아온 셈이다. 돈에 의해 인간의 행위 자체가 물화되고 더 이상 인간 자체에 대한 존재 가치를 허용하지 않는 사회.. 이상의 <날개>의 아내 역시 그레고르처럼 행위가 돈으로 환산됨으로 인해 그녀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되버린 인물이다.
왜 그들 내객은 돈을 놓고 가나? 왜 내 아내는 그 돈을 받아야 되나? (...) 혹 무슨 대가일까? 보수일까? 왜 아내가 그들의 눈에는 동정을 받아야만 할 가엾은 인물로 보였던가?
그런 의미에서 외형적으로 소름끼치고 위협적인 하지만 무방비적이고 약함으로서 아버지의 사과 공격에 의해 파멸되고 마는 하잘 것 없는 벌레로의 변신은 어쩌면 인간내부에 존재하는 긍정적인 구원의 의미로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일종의 순수자아의 상징인 것이다. 자유의 가능성을 부여하는 동시에 삶에 대한 포기이면서 진정한 삶에 대한 주장일 수 있다. <변신>의 벌레는 출구 없는 상황에서도 이를 통해 인간 내면에 있는 원천적이고 본질적인 문제들을 제기함과 동시에 이를 형상화한다. 하지만 이러한 벌레로 변신해버린 그레고르를 보고 주변인물들은 뒤로 물러나거나(지배인), 느닷없이 쓰러지고(어머니), 주먹을 불끈 쥐고 울기 시작(아버지)한다. 그와 막역했던 누이동생마저 그 흉측한 외양을 보기 두려워, 억지로 호의를 베푼다.
이럴 순 없어요. (...) 이런 괴물에게 내 오빠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 않아요. 제가 단지 말씀드리는 것은 우리가 저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거예요.(161)
가장 아릅답고 사랑에 차야하는 가족들 사이의 관계조차 허위에 근거를 두고 있던 것. 가족들로부터 겪게되는 기만은 <날개>의 ‘나’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실로 세상에도 이상스러운 것이 눈에 띄었다. 그것은 최면약 아달린 갑이었다. 나는 그것을 아내의 화장대 밑에서 발견하고 그것이 흡사 아스피린처럼 생겼다고 느꼈다. 나는 그것을 열어 보았다. 똑 네 개가 비었다. 나는 오늘 아침에 네 개의 아스피림을 먹은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 나는 아스피린으로 알고 그렇게 한달 동안을 두고 아달린을 먹어 온 것이다. 이것은 좀 너무 심하다. (...) 그리고 선을 찾아 올라갔다. 인간 세상의 아무것도 보기가 싫었던 것이다.
단지 일상적인 자아로서만 존재하던 ‘나’는 외출로 인해 일상적인 자아와 본래적인 자아가 공존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며 이로 인해 갈등을 겪는다. <변신>에서 그레고르가 해충으로 변신하게 되면서 겪게되는 자아분열과 비슷한 양상이다.
내객이 아내에게 돈을 놓고 가는 것이나 아내가 내게 돈을 놓고 가는 것이나 일종의 쾌감 - 그 외의 다른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을 나는 또 이불 속에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이불 속의 연구로는 알길이 없었다. 쾌감, 쾌감하고 나는 뜻밖에도 이 문제에 대해서만 흥미를 느꼈다. 아내는 물론 나를 늘 감금하여 두다시피 하여 왔다. (...) 그런 중에도 나는 그 쾌감이라는 것의 유무를 체험하고 싶었다.
<날개>에서 ‘나’의 외출은 총 다섯 번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그는 첫 번째 외출에서는 자신이 돈을 쓰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음을 느낀다. 즉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했음을 그리고 사회에 속할 수 없는 소외된 존재임을 의미한다.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외출을 하며 감기로 인해 한달 가량 외출을 중지했다가 어느날 최면약 아달린 갑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그는 네 번째 외출을 시도한다. ‘나’는 산에 가서 아내에 관해 연구해 보았지만, 알 수가 없다. 하지만, 네 번째 외출후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보게된 나는 다섯 번째 외출을 하게 되고, 이를 통해 그동안 은폐되어있던 아내의 본질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죽음 vs 날개
자기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에 대한 그의 생각은 아마도 여동생의 생각보다 더 확고한 것 같았다. 교회의 탑시계가 세시를 칠 때까지 그는 이렇게 공허하고 평화로운 명상에 잠겨 있었다. 그는 창 밖에서 세상이 환해지기 시작하는 것도 느꼈다. 그러자 그의 머리가 자신도 모르게 푹 수그러졌다. 그의 콧구멍에서는 마지막 숨이 힘없이 흘러나왔다.(164)
그레고르는 동생이 그에게 보인 행위가 애정이 아니었음을 알게되고 삶의 의미를 상실하게된 후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의 죽음은 동생에 의한 결정적인 실행이라기보다는 그레고르의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레고르의 죽음은 일종의 화해다. 목표달성에 대한 체념이자, 불안과 소외에 대한 패배이기도 하다. 이제까지의 삶이 부조리했음을 인식했음에도 결국 기존의 자신에게로의 복귀를 희망했기에 그 통로를 상실하고 결국 죽음에 이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또다른 죽음의 의미가 담겨져 있다. “우리에게 구원은 죽음이다”라고 카프카가 말했듯이 그레고르의 죽음은 현실적인 모든 소외감과 갈등에게 벗어나게 한다는 점에 있어 자신의 영혼을 구제해주는 역할을 한다. 인생의 모든 사건과 갈등의 종말 및 해결을 의미하는 죽음이 아닌, 자기 영혼의 구제를 위한 죽음.
그런 다음 그들은 함께 집을 나섰다. (...) 타고 있는 사람이라곤 그들밖에 없는 전차에는 따스한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들은 의자에 편안히 기대어 앉은 채, 장래의 전망에 대해서 얘기했다. (168)
그레고르가 변신 전, 직장과 가족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했음에도, 아무도 그를 진정한 모습으로 대해주지 않았다. 그레고르는 이러한 가족들의 외면 속에서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자신’을 찾았다고 볼수 있지 않을까. 카프카는 이처럼 죽음을 선택한 주인공을 통해 결국 그레고르의 의식은 깨어있었고, 우리에게 의식의 깸, 즉 자아보존의 필요성을 외치고자 했던게 아닐까.
다음은 <날개>에서의 ‘나’의 마지막 선택이다.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 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리 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날개>의 ‘나’는 거리를 돌아다니다 정오의 사이렌 소리를 듣고 옥상에 올라 날개의 비상에의 욕구를 별치는데, 이는 누이동생이 그레고르의 선택을 재촉했듯이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있던 ‘나’에게 그 선택을 강요함과 동시에 현실의 상황에 대해 제대로 인식토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나’에게 있어 날개의 비상은 주인공의 자각에 비롯된 것으로서 폐쇄된 공간과 시간에서 탈출로서의 비상을 꿈꾸게 함과 동시에 자신이 갇혀 있다는 것을 자각하게 하는 것이다. ‘나’는 날개의 비상을 꿈꾸기까지 아내가 외출하고 난 뒤 아내의 방에 가서 화장품냄새를 맡거나 돋보기로 화장지를 태우면서 아내에 대한 욕구를 대신한다. 아내는 자신의 매음행위에 거추장스러운 ‘나’를 볕 안 드는 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수면제를 먹인다. 아내의 매음 현장을 목격하고 난 뒤에야 거리를 쏘다니다 미시꼬시 백화점 옥상에 올라 스물여섯 해의 과거를 회상하며 ‘날개야 다시 돋아라. 한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라고 외치는 ‘나’ 이러한 날개의 비상은 그레고르의 죽음과 마찬가지로 폐쇄적이고 어두운 방으로부터의 탈출, 부조리한 현실로부터의 해방, 의지적 인간 회복을 의미하는 일종의 부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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