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5월 30일 일요일

우리는 어디서나 / 오규원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앉으면 중심이 다시 잡힌다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일어서기 위해 앉는다

 

만나기 위해서도 앉고

협잡을 위해서도 앉고

 

의자 위에도 앉고

책상 옆에도 앉듯

역사의 밑바닥에도 앉는다

 

가볍게도 앉고

무겁게도 앉고

 

청탁불문 장소불문

우리는 어디서나 앉는다

 

밑을 보기 위해서도 앉고

바닥을 보기 위해서도 앉는다

 

바로 보기 위해 어깨를 낮추듯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 문학과지성사)

 

펼쳐두기..


 

2010년 5월 29일 토요일

Skunk anansie - Charlie Big Potato

 

 

"오르가즘 후의 허무(Post Orgasimic Chill)"

 

 

 오늘은 락밴드 역사상(?) 가장 마이너했기에 가장 강렬한 인상을 풍겼던 뮤지션, 스컹크 아난시 (Skunk Anansie)를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오르가즘 후의 허무(Post Orgasimic Chill)". 이 놀랍도록 섹시한(?) 앨범의 타이틀이 99년 음악잡지 '핫뮤직'에서 처음 언급되었을 때만 해도, 난 이들이 그저 90년대 한창 봇물터지듯 흘러나오던, 다분히 퇴폐적인 밴드중 하나일 꺼라 섣불리 짐작했었다. 헌데 보컬 '스킨'의 프로필을 보아하니, 반나치주의 운동과 동성 연애 지지 운동에 투신했던 경력이 눈에 띠었다. 게다가 이 여자, 누가봐도 소울(soul)스럽다 싶은 음색으로 무장한 '흑인 락 여성 보컬리스트'였던 것. 백인 남성들의 전유물에 가까운 락 음반 시장에서 일단 비쥬얼(?)부터 색다른 이 밴드, 지극히 다의적인 의미를 띄는 가사들도 그렇고, 도무지 장르를 규정할 수 없는 사운드도 그렇고, 뭔가 심상치 않아보이기 시작했다.  이를테면, 온갖 '마이너'한 요소들로 무장한 '전사'의 이미지가 풍겼던 것.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들은 위의 앨범, 3집 'Post Orgasmic Chill'을 끝으로 해체의 길을 걷게된다. 94년, 백인 남성 위주의 브릿팝이 한창 절정이던 런던에서 결성되어, 한때는 이름이 꽤 알려진 영국의 음악 잡지 '커랭(kerrang)'에서 'Best British Band'부문에 노미네이트 될 정도로 잘나가던 밴드였음에도, 마치 앨범의 타이틀 마냥 2001년 돌연 해체해버린 것이다. 이유는 다름아닌 지나친 '상업화'의 휴유증때문이었다. 이후 보컬 '스킨'은 재기를 노리고 머리카락까지 기르며 달달한(?) 목소리의 솔로 앨범을 발표하지만, 대중들에게 이전만큼의 큰 반향은 일으키지 못한다.

 

 

 대중음악이 온전히 정치적일 수 있을까

 

 

 사실 이러한 수순을 밟은 뮤지션들이 어디 이들뿐이랴. "Killing in the name" 같은 정치적 선전 문구로 90년대를 화려하게 장식했던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Rage against the machine) 같은 밴드 조차, 국내 내한공연에서 수익성이 없다며 불만을 토로하고 돌아갔다는 사실로 미루어볼때, 상업화를 온전히 배재한 '정치적'인 대중음악이란게 어느 수준까지 가능한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이 든다. 인지도가 올라가고 자신들의 음악을 '메이져'한 대형 음반사에서 관리하게 되면서부터, 대부분의 모든 락밴드는 본연의 '마이너'함을 잃을 수 밖에 없다. '세상 어느 누구도 내가 블랙 레즈비언이기에 'Shut up'하라 강요할 수 없다'고 외치던 '스킨'의 목소리는 아이러니하게도 세상에 외쳐지는 순간부터 자본의 또다른 상품이 되어버렸다.

 

 

 어디 음악만 그러하겠는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는 것'이 시詩라면, '보이지 않는 것이 보여지는 순간' 시도 그 힘을 잃게 될지 모른다. '들리지 않던 것이 들리게 된 순간' 이들 역시 더이상 그것이 애초에 지향하던 순수함을 잃게 되었던 것처럼. 그러나 '보이지 않는 진실'을 '보여주려는' 노력이 바로 정치성이라면, 그것도 세장 모든 '마이너'들의 정치적 동력이라면? '잃어버린 시구를 찾아 오늘도 나는 거리에 나선다'던 스페인의 시인 로르카의 말처럼, 끊임없이 '보려는' 그리고 '들리게하려는' 노력 안에서 락, 그리고 대중음악의 정치성을 다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이른바 '뜬' 뮤지션들이 '상업화의 후유증'과 '분출된 정치적 힘' 사이에서 헤매야 했던 그 고민은 가볍지 않은 것일 게다. 최근 Skunk Anansie의 재결합 소식이 들려오던데, 이들이 그간의 공백을 깨고 얼마나 '들리게 하려는' 노력으로 무장했을지, 사뭇 기대가 되기도 한다.

 

 

찰리네 큰 감자

 

 이번 선곡은 Post Orgasmic Chill 앨범의 첫번째 싱글발표곡, 'Charlie Big Potato'이다. '찰리의 꿈'으로 대표되는 지배계급과 언론의 세뇌에 맞서 '그 추악한 진실을 밝혀라'고 외치는 곡이다.  TV만 틀었다하면 되풀이되는 '북한 + 천안함' 관련 보도를 듣고 있자니, 요사이 특히 이 곡의 의미가 좀 더 절절해진다.

 

 

 선거의 시작에 때 맞추어 발표된, 일명 '파란 매직 1번'의 천안함 사태 진상조사 결과를 두고, 처음엔 그 발상 자체의 어이없음에 한바탕 실소를 터트릴 수 밖에 없었다. 한 편의 저질 코메디같은 시나리오에 과연 누가 세뇌되고 누가 동요하랴 싶기까지 했던 것. 하지만 문제는 정부의 이같은 책략에 소위 보수 언론들의 해괴망측한 상상력이 덧붙여지면서, 이들이 의도한 효과가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는 '천안함 조사를 불신하는 사람은 친북좌파이거나 원천적 안티세력'이라 사건의 본질을 호도하고 있고, 언론은 '국민이 3일만 참으면, 전쟁도 해볼만하다'라는 투로 위협을 가하고 있다. 단순히 '이런 식으로 큰 웃음 주지는 마시라고' 하기엔, 사태가 심상치 않아보인다. 주가가 폭락했고, 환율마저 치솟았으며, 외환 투기의 기미마저 나타나고 있다. 선거 관련 여론조사에서 천안함 발표전까지만 해도 주춤했던 기존 세력의 지지율이 다시 상승하고 있는 것이다.

 

 흐르는 강의 물 길을 틀어막고, 그 강에서 살고 있던 수많은 생명들에 대해 무자비한 살육을 감행하며, '이것이 녹색성장'이다 외치는 정부. 그들의 해괴한 논리는 천안함 사태에서도 되풀이 되고 있다. 보고있자면 기분이 무척이나 더러워지는 저 기묘한 요술들을 텔레비젼 전원을 끄듯 꺼버리고 싶어지는 요즈음이다.

 

2010년 5월 28일 금요일

꽃세상

 

장미와 수국과 작약의 계절 5월.

이 화려한 꽃세상때문에 숨이 터억 막힐지경이다.

 

펼쳐두기..


 

 

방랑벽이 도지다.

 

 

  아무래도 방랑벽이 도진 듯하다. 생명줄이라도 되는양 아끼던 여권의 유효기간이 만료된지 이미 8개월이 지났음에도 연장할 생각을 안할만큼, 최근 몇 년, 여행에 있어서만큼은 꽤나 '금욕적'인 마인드를 유지한 채로 잘 지내왔었는데... 두번 다시 강남역 마실나가듯 해외로 여행 가는 일은 없어야한다고 스스로에게 한 굳은 맹세를 그래도 그간 제법 잘 지켜왔던 것이다. 실제로  제작년 여름휴가는 촛불에, 작년 여름휴가는 스피노자와 함께 흘려보냈으며, 어쩌다 다가온 황금연휴에도 책읽기에 몰입하거나, 집청소 좀 해보겠다고(!) 몸부림을 쳤을 뿐이니, 내심 장하다 싶기도 했었다.

 

 하지만, 월요일 오전, S양이 메신져로 'ㄱ쌤이 열하에 간다는데 따라갈까봐요'라는 멘션을 날리고부터, 내 안의 나르치스적 기질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고, 골드문트가 되돌아오셨다. ㅎ 정신나간 사람처럼 한달 넘게 남은 여름휴가 계획에 돌입하게 되버린 것. 언젠가부터 가고싶은 곳 0순위인 뻬쩨르부르크는 지금은 준비가 전혀 안되어있는 상황이므로 일단 패스했고, 오래 전부터 막연히 꿈꾸던 국내 일주를 실행하느냐와 근교(?) 해외 지역을 나갔다오는 문제를 놓고 저울질이 시작되었다. 근교 해외지역으로는 아직까지 항공권 여유분이 제법 넉넉한데다 가격까지 매우 훌륭하신 베트남항공의 특판가에 힘입어, 북부 베트남 지역이 제 1순위로 물망에 올랐다. 일단 베트남은 하루 5불로 생활이 가능한 곳이니만큼, 기본 경비 지출에 있어서는 양쪽이 의외로 비슷한 수준.

 

 굳이 기름을 낭비하며 해외로 여행을 가야만할 '절실한' 이유가 있는가. 라는 다분히 윤리적 자존심을 건드리는 질문이 머릿 속에서 쉬이 지워지지 않은 채로, 마음이 점차 해외쪽으로 기울고 있는 중이다. 특히나 (누가 이렇게 'X같은'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동양의 알프스라고 불리우는 사파와 그 인근 지역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중인데, 이를테면 '여행객으로 인해 오염된 현지의 경제 혹은 관계들'같은 주제에 대해 벌써부터 손가락이 근질근질해지는거다. 저널리스트도 아닌 여행객 신분으로 다녀오겠다면서, 이 얼마나 '개같은' 역설과 허세이겠냐마는...

 

 '무엇을 할 것인가'보다 중요한 건 '무엇을 느낄 것인가'이다. '인간애의 회복'을 목표로 하는 일정이 됬든, '착한 여행이란 가능한가'라는 질문의 답을 구하는 과정이 됬든, 무언가 문제 의식을 잔뜩 품은 채로 돌아올 자신이 없다면, 애초에 떠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이번주 내로는 답을 내야 뭔가 추진을 할지 말지를 결정할 수 있을텐데, 쉬이 결정을 내릴 수 없는 문제라 조바심까지 난다. 하지만 며칠째 38L짜리 오스프리 가방과 45L짜리 '노스'페이스 배낭을 놓고 고민하다, 오늘 결국 나도 모르게 45L짜리를 주문해놓긴 했으니, 마음은 이미 베트남쪽으로 기운게 확실해 보이기는 하는데... ㅋ 에라이. 나 좀 속물같다.

 

 

2010년 5월 23일 일요일

우리를 고쳐줄 자 누구인가.

 

 

펼쳐두기..


 

 

+

도봉구에서 왔다는 이수명 씨(가명, 34)는 "솔직히 노무현 전 대통령을 지지를 했었는데, 재임기간 동안 많이 실망을 했었고, 그래서 작년에는 추모 행사에 한 번도 안 갔다"고 했다. 그는 이번에 참여한 이유를 두고 "개인적으로 이 정부에 대한 분노 때문에 왔다"며 "다른 사람들도 그로 인해 대부분 모인 거 같다"고 말했다.

(국민들이 노무현 무덤을 파헤치는 것만은 막아달라 / 프레시안 10.5.23 )

 

밤새 혼탁해하다가, 아침에 이 기사로 보는 순간 무언가 명백해진 기분이 들었다. 인터뷰대로라면, 실제로 그렇든 안그렇든, 노무현은 반 MBㆍ반민주주의에 대한 일종의 아이콘 내지는 기호가 되어있는 게 분명한 것이고, 그것이 지극히 대중의 '감성'을 건드리고 있다는 것. 어차피 산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열 낼 필요가 있을까 싶어, 조용히 '면벽수행'하기로 결심했다는 소식을 덧붙인다. 뭐 그러거나 말거나.. :(

 

 

 

2010년 5월 20일 목요일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

 

 

 

 

 

 

 

 

 

 

 

 

 

 

 

 

 

 

 

 

 

 

 

 

 

 


펼쳐두기..

 

2010년 5월 19일 수요일

울음이 타는 강

 

강이 더 망가지기 전에 한번 다녀와요

 

그동안 강의 비명소리를 진즉부터 듣고 있었음에도 선뜻 현장을 향해 걸음을 내딛지 못했던 건 사소한 일상을 핑계로 한 ‘귀차니즘’에 기인한 것이라 생각했었다. 따라서 휴일 아침의 이른 새벽, 단잠을 포기하고 나서는 발걸음이 가벼울 리 없는 게 당연하다 싶기도 했다. 당장이라도 침대로 돌아가고픈 무거운 몸을 이끌고 강을 향하며 ‘강이 더 망가지기 전에..’라는 문구를 주문처럼 되뇌었다.

 

내가 낙동강을 처음 밟았던 건 5년 전 이 맘 때이다. 우연히 들린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뒷 켠에서 찾게 된 낙동강은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이라는 김소월의 시구가 단순히 머릿속에서 그려낸 묘사가 아니었음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왜 학창시절 한국지리 교과서에서는 강의 사구에 대해 설명하며 이것들이 이렇게나 처연하고 아름다운지를 이야기해주지 않았던 걸까. 이렇게 내가 처음 만난 강은 선인들이 이야기하던 자연과의 물아일체가 어떤 의미였는지 그 뜻을 절실히 깨달을 정도로 감동적이고도 슬픈 장소였다. 이후 일상의 험한 일에 지칠 때면 무엇보다 먼저 강을 찾는 게 습관이 되어버렸다. 강을 찾기만 하면 이상하게도 쉬이 흐르는 강물에 상념을 떠내려 보낼 수 있었으니 강은 내게 있어 일종의 치유제였던 셈이다.

 

이렇게 추억을 더듬으며 낙동강으로 향하고 있자니 여러 기억들을 품고 있는 강이 얼마나 망가져있을지를 상상하는 일이란 단순히 무거운 몸을 뛰어넘는 괴로운 과정일 수 있겠다는 망설임이 찾아왔다. 한때, 지금은 헤어진 연인과 함께 걷던 골목길이 어느 순간 불도저로 파헤쳐져 있음을 보게 되었을 때 느끼는 서러움과 비슷한 감정이다. 어쩌면 강을 향한 걸음을 미뤄왔던 이유라 내세우고 있던 일상의 피로함은 그저 둘러대기 좋은 핑계였을 수도 있다. ‘사라지는 것들은 목도한다는 것’, 그 잔인한 애상의 감정이 선사할 마음의 피로함과 내 작은 발걸음이 사라져가는 그것을 과연 지켜낼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에 시작부터 마음이 여러모로 착잡해졌다.

 

 

 

눈물과 분노의 현장

 

얼마쯤 달렸을까. 이윽고 버스가 도착한 곳은 낙동강 강창교 부근이다. 구불구불 흐르는 강과 빛나는 모래톱에 감탄했던 건 잠시 포크레인으로 파헤쳐진 모래와 강창교 언저리에 고여있던 탁한 색깔의 작은 웅덩이가 눈에 띄었다. 어떻다는 판단을 내리기에 앞서 어느새 눈가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부쩍 감성이 메마르고 있다는 위기의식으로 절절한 낭만주의 시구를 읽으며 아무리 노력해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파헤쳐진 강 언저리를 보자마자 단 몇 초 만에 고였던 것이다.

 

이어 목도한 상주보 공사현장은 강창교를 바라보며 한껏 유약해진 감성에 분노의 불을 지폈다. 언제고 당연히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곳이 사라져있었고 그 자리에는 도심 아파트 공사현장에서나 볼 법한 거대한 토목장비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사진기를 들이밀고 있자니 안전모를 쓴 공사관계자가 넌지시 말을 건넨다.

“아가씨. 거기 뱀 나오는 데야. 얼른 비켜. 뱀 나와!”

 

그 순진한 위협에 헛웃음이 터졌지만 입 안은 씁쓸해졌다. 공사를 주도하는 현 정권이라는 게 이런 식이다. 다시 말해 ‘죽은(?) 지역 경제를 살리기 위해’ , ‘다가올(?) 홍수를 방지하기 위해’, 출처 불명의 ‘물 부족 국가’라는 주장을 통해 우릴 겁박하며 4대강 사업이 필수불가결하다고 주장한다. 도래하지 않은 위험을 이용한 위협으로 자신의 이권을 위한 사업을 너무 쉽게 합리화해 버린다. 그러나 그 가공의 위협이라는 것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광경을 직접 보고 있는 누구에게 들이댔을 때 힘을 잃는다. ‘뱀 나오니 강가에 가지 말라’는 것처럼 ‘실소’가 나왔지만, 저들은 스스로 그 순진한 위협을 만들어냈다. 스스로 창조한 위협을 제거하기 위해 다른 모든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강을 위해서는 누가 울어줄 것인가

 


상주보 현장을 떠나 일행은 자전거로는 전혀 오르지 못할 것 같은 자전거도로를 걸으며 청룡사 전망대로 향했다. 저 멀리 보이는 낙동강의 모래톱, 그 한가운데 오리섬이 있다. 오리섬은 한때 버드나무 숲이 울창했던 곳으로, 수십 마리의 노루와 수많은 철새가 오가던 생태의 보고였던 곳이다. 이곳을 밀어내고, ‘동물원’과 같은 생태 공원을 조성하려는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대한민국 행정을 책임지고 있다는 고위 관료가 한 말이 떠올랐다. 4대강을 ‘어항’으로 만들겠다는 그 솔직한 속내가.

 

4대강 사업으로 이미 파괴되거나 파괴될 것으로 예상되는 수많은 생명체들이 있다. 이대로라면 멸종의 길을 걷게 될 단양쑥부쟁이 군락이나 떼죽음당한 수천마리의 물고기를 흙으로 덮어 은폐하려는 시도는 이미 언론으로 보도된 바 있다. 정권은 “공사 기간 중에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 따르겠지만, 인공적인 생태 공원이 조성되면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때 자리 잡게 될 생명들로 지금 살육당하는 생명들을 위로할 수 있다는 생각이 도대체 어디서 나온 논리일까. 쉬이 납득할 수 없지만, 그래, 그렇다 치자. 그렇다면 사라진 강과 사라질 기억들은 누가 어떻게 복원해줄까. 울어 주기는 할까?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저것 봐,
네보담도 내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보것네.

- (울음이 타는 가을 江 / 박재삼)

흔히, 생명이 없는 것들은 생명이 있는 것들에 그 우선순위를 빼앗겨 먼저 희생되는게 당연하다고 여겨지곤 한다. 또한 생명들 간에 있어서도, 우리가 인간이라는 한계로, ‘사람이 먼저다’라는 논리를 ‘생명에는 우선순위가 없다’라는 논리보다 앞세우곤 한다. 인지할 수 없는, 우리가 아닌 것들의 아픔과, 파괴되는 우리의 감성들에 대해, 우리는 너무 쉽게 ‘별 것 아닌 일’ 이라며 망각해버린다. 그래야 좀 더 나은 삶이 도래한다고, 내가 그리고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란 게 필요하다고 주입받으며 살아왔던 탓일 수도 있다.

 

상처받은 마음을 안고 찾았던 기억 속의 강, 그때의 나를 대신해 하염없이 울어주던 바로 그 강 때문에, 이제는 내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이 기가 막힌 살육을 그만해달라고, 그 아스라했던 흔적들을 지우지 말아달라고, 눈물로 외치고 돌아오는 길, 노을로 붉게 물든 낙동강에는 울음이 타고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이었을 강, 내게는 감성의 회복제이자 치유제였던 강, 그 강이 소리 죽여 울고 있었다.

 

(위클리 수유너머 게재)

2010년 5월 17일 월요일

카프카의 '변신' 그리고 이상의 '날개'

 

 

변신 전의 그레고르 vs 외출 전의 ‘나’

 

어느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의 커다란 해충으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109)

 

펼쳐두기..


 

2010년 5월 16일 일요일

 

 

 요 몇 주간은 이 블로그가 개설된 이래, 가장 오랜 시간동안 업데이트가 지연되지 않았나 싶다. 그럼에도 조회수에는 큰 변화가 없는 걸 보면, 우선 신기하기도 하고 죄송스럽기도 하고.. 뭐 그렇다.

 

 그동안 여기저기 많이 쏘다니기도 했고 어마어마한 발제의 압박에 시달리기도 했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이런 블로그 포스팅 같은 '가벼운 글'을 써달라는 부탁을 몇차례 받았다. 글이란게 참 신기하지.. 혼자 끄적끄적거릴 때는 쓰는 일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았었는데, 막상 청탁을 받아 쓰려고하니 몇문장 쓰는데도 머리를 쥐어뜯게 되더라. 그렇다고해서 완성도 높은 글이 나온것도 아니다. 오히려 평소보다 더 어이없는 문장들로 대강 떼우고 말았다는 자책에 머리를 스스로 찧고 있다.

 

 게다가 L모 선생님께서 몇몇 진짜 작가들에게까지, '이 사람, 문학지망생이야'라는 소개를 던져주신터라, 글을 쓰는 일이 아주 제대로 부담이 되고있다. 아니, 제가 언제부터 문학지망생이였나효? 아무리 눈을 흘겨도 아랑곳하지 않으신다. 내 분명히 장담컨데, 이런 소개를 듣는 사람들 모두, 머리속으로는 분명히 '요새 문학 지망생들 수준이 저 정도로 형편없군'이란 생각을 하고 있을게야. ㅜ 지망생은 아무나 하나? 기본이라고는 전혀 없는 내게 자꾸 이런 타이틀이 씌워지고, 자꾸만 '훈련을 시키겠다'며 원고를 청탁받는 일이 잦아졌다. 아악. 한마디로 P말마따나, 제대로 '낚인게다.' 하하

 

 물론 분명한건 이 모두가 다 '좋아서 하는 일'이긴 하지만, 요새들어 특히나 이렇게 카드빚을 메꾸듯 '대강대강' '쫓기면서'해도 되나 싶어진다는거다. 과연 '훈련'이라 불리우려면, 과정마다 뭔가 나아지는게 있어야하는건데, 이미 실력에 비해 너무나 '과도평가'되고 있는지라, 주위의 기대치만큼 따라잡는 일조차 벅차보이는 것. 이러니 자꾸 주눅만 들고, 죄스러운 마음만 앞선다. 앞으로라도 좀 더 개인적인 시간을 쪼개어 노력해보자는 결의 한켠으로, 지금도 뼈를 깍는 고통으로 새벽3시 이전엔 잠들지 못하고 있는데 여기서 더 어떻게 하란말이야? 라는 볼멘소리가 터져나온다. 여기에 들이대기는 역시나 민망하지만, 평생 직장을 그만두지 못한채로 글을 써야했던 카프카의 고뇌가 어느정도는 이해되는거다. 정말이지, 하루가 36시간이였으면 좋겠다. 절대적인 시간이 너무나도 부족하다. 흑

 

 이런 투정들을 내뱉으며 징징댈 때마다, P는 욕심부리지 말고 '그까이꺼 대강' 하라고 말해준다. 심지어, '니가 공부쪽으로는 몰라도, 글을 쓰는 일에 있어서는 꽤 뛰어난 소질이 보인다'고 칭찬해주는 일도 잦다. 그 위로에 은근 기분이 좋아져, 요샌 아주 만날때마다 징징대고 있다. 이러다 조만간 '팽'당하지 싶어. ㅋ 쓰는 일이란게 이렇게나 외롭고 가슴죄어오는 일인건데, 그동안 묵묵히 견뎌왔을 그에게 제대로 위로의 말 한마디 해주지 못한채로 이렇게 받기만 하고 있으니, 미안해서 어쩌나싶다. 오늘은, 무려 '오빠가 돈 많이 벌어올께'라며 카메라와 노트북을 들춰메고 돌아서는 그이의 뒷모습을 보고있자니, 가슴 한켠이 싸해지고 뭐 그랬다. 닭살이라고 뭐라해도 좋아. 미안한건 미안한거고, 고마운건 고마운거다.

 

 휴우, 어찌되었든 지난주 3편의 발제에 이어, 이번 주말에도 꼭지 맡은 글을 써냈으니 (이렇게 여유부릴만큼) 후련하긴 하다. 딱 커피 한잔만 드링킹하고, 냉큼 집에가서 내일 있을 마키아벨리 발제와 카프카의 변신과 이상의 날개 비교 글만 쓰고나면, 이번주 '써야할 글'은 끝이다. 얼릉 마쳐놓고, 앞으로는 밀린 글감들로 포스팅에도 신경을 쓰도록 하겠슴니다. 그간 뜸하다고 '얘 뭐야?'하셨던 분들, 너무 뭐라지 말아주세용. 잇힝 ;)

 

 

 

 

 

2010년 5월 10일 월요일

By this river

 

 

 

 

 

 

 

 

 

 

 

 

 

 

 

 

 

 

 

 

 

 

 

 

 

펼쳐두기..


 

2010년 5월 9일 일요일

공정한 소비라는 환상

 

 

시작하며

 

신문을 보니까 우리보고 좌파라고 하대예. 나는 좌파가 김일성 찬양하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참 이상하네' 싶었지예. 마, 내가 옥쇄파업 때문에 평택에 올라왔다는 소식이 알려지니까 친척들이 다 전화를 해쌓는기라. '거기 좌파에 세뇌되면 우짜노'하고 걱정하대예. 허 참, 언론이 무섭긴 무섭네예.

6월, 도화선 될지 모를 쌍용차...中 / 프레시안 (2009. 6. 10)

 

사실 요 몇 년 사이, 대한민국 곳곳에 이렇게나 좌파가 많았나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많은 이들이 보수 언론 내지는 수구 세력에 의해 좌파 혹은 빨갱이로 지목되었다. 비단, 용산범대위나 쌍용차노조뿐 아니라, 노사모까지 범좌파단체로 규정되는 현실이다. 하지만, ‘좌파로서 살기’이란 결코 녹녹치 않은 일이다. 편의점에서 우유를 하나 집으려 해도, 이내 머릿속엔 공장형 축산 시스템이 지닌 폭력성이 떠오르고, 커피 한 잔 사 마시려 하면, 제3세계에서 싼 값에 착취당하는 어린 노동력이 떠오른다. 그까짓께 뭐 그리 대수이겠냐고 중요치 않게 생각했던 일상의 대부분의 것들은 사실 누군가 흘리는 피고름의 산물이다. 그것이 자신에게든, 타인에게든, 품위를 지킬 줄 아는 좌파로 사는 것은 어렵다.

 

 

공정 무역, 착한 소비의 등장

 

남자친구에게 선물할 초콜릿을 사기 위해 발품을 판 박oo씨(22.대학생)는 “잡지와 인터넷을 통해 공정무역 초콜릿의 존재를 알게 됐다”면서 “맛도 좋고 유기농이라 더욱 안심이 된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시중에 판매되는 일반 고급 브랜드 초콜릿 값과 별반 차이가 없다”면서 “무엇보다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는데 한 몫 거들고 있다는 사실에 가슴 한 구석이 뿌듯하다”고 덧붙였다.

발렌타인데이 ‘착한’ 사랑고백이 뜬다 / 경향신문 (2009. 2.11)

 

 ‘공정무역 초콜릿’이란 상품이 작년, 진보 언론의 기사를 시작으로 화제가 됐다. 나 같은 고민을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던 것일까. 발렌타인데이에 공정무역 초콜릿 선물하기 열풍은 올해 역시 이어져, 대형 인터넷 쇼핑몰 뿐 아니라 국내 주요 백화점에서까지 공정무역 초콜릿이 판매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지난 해 밸런타인데이가 있은 2월 한 달 동안 우리 쇼핑몰의 매출액은 390만 원이었다. (기존의) 일 년 동안 우리의 월 평균 매출액은 170여만 원이었다. (......) 그런데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지난 2주 동안 주문이 물밀듯이 쇄도하였다. 그동안 하루 서너 건에 불과했던 주문이 하루 1백 건, 2백 건 씩 들어와 초콜릿이 동 날 정도였다. 하루 매출액이 지난 해 한 달 또는 두 달 매출액에 다 달았다. 구멍가게에서 갑자기 중소기업이 되는 듯 했다.

 

 ‘착한 초콜릿’ 대박으로 돈은 얼마나 벌었을까? / 박창순, 공정무역 울림

 

 

이번 설문조사에서도 공정무역 제품 구매 이유로 '소비를 통해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다'(45.6%), '근본적인 취지가 좋아서'(44.5%), '주로 친환경 제품이라서'(12.9%) 순으로 응답했다.

 

최고 인기 공정무역 제품 / 한국경제 (2009. 5.15)

발렌타인데이를 앞두고, 초콜릿을 구매하고자 했던 많은 이들에게 ‘공정무역 초콜릿’이란 그동안의 윤리적 고민을 덜어주는 대안 상품으로 등장했다. 주는 이도, 받는 이도 더 이상 초콜릿이 지니는 시초의 폭력성에 대한 죄책감에서 어느 정도 해방될 수 있었다. 공정 무역 초콜릿이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데 기여하고 있다는 윤리적 만족감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공정무역은 1946년. 미국 Ten Thousand Villages에서 푸에르토리코의 바느질 제품과 1950년대 후반 영국 Oxfam 가게에서 중국 피난민에 의해 만들어진 공예품 판매하게 되면서 시작됐다. 1960년대 들어 공정무역 조직이 결성되었고, 제3세계의 빈곤문제가 심화되면서 하나의 시민운동으로 자리 잡았다. 대안(Alternative) 혹은 공정(Fair) 무역이라 불리는 이러한 소비운동의 확산은 애초부터 도움이 아닌 거래(Trade, not Aid)를 모토로 내세웠다.

 

하루 단 $1가 없어 굶주리며 아기들을 업고 구걸하며 살아가는 무기력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일회적인 구호물자뿐 아니라, 적정한 근로수당이 보장되는 안정적인 일자리이며, 지속적인 교육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빈곤의 대물림을 막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경제적으로 소외 받고 있는 제3세계의 어려운 사람들의 경제적인 자립을 목표로 하는 새로운 방식의 무역이 바로 '공정무역'입니다. 공정무역은 현재 전 세계의 많은 시민들과 단체들의 호응 속에서 기존의 경제구조에서 밖으로 밀려나있던 사람들에게 교육과 일자리를 제공하고 환경 친화적인 방식으로 상품을 생산 관리하며, 생산자들의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삶’을 고려한 근로조건 및 임금을 제공함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보다 윤리적이고 지속 가능하도록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공정무역이란? / 한국공정무역연합

 

 

공정무역은 과연 공정할까?

 

‘공정 무역’, 그리고 '공정'의 개념과 범위는 막연하다. 무역에서 '공정'이라는 개념은 기존의 '불공정'한 유통과정, 즉 합리적인 노동의 대가가 지불되지 않는 형태의 상품 거래, 자본의 규모와 그 자본이 소유한 유통망의 확장성 등을 앞세워 일방적으로 이익을 뽑아내는 방식을 벗어난 모든 형태를 말한다. 여기서 '공정 무역'이란 '개인적 소비로 거래되는 제품들 중 공정한 거래 과정을 거쳐 판매되는 상품들'로 한정지을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으로, 공정무역을 통해 거래되는 상품 역시 소비를 전제로 한다. 공정무역이란 단어는 '공정' 외에 '소비'라는 개념 역시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중성을 지니는 것이다. ‘공정’이라는 개념은 이분법적으로 쉽게 나눌 수 없는 일종의 추상 명사이다. 어디까지가 공정하고 어디까지가 공정하지 않은지, 이를 측정할 척도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비해 ‘소비’라는 행위는 그 과정 자체가 자본의 추동력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비교적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개념이다. 맑스는 (노동자의) 개인적 소비를 ‘남의 부副를 창조하는 힘을 생산하는 것’이라 보았다.(p.779) 소비란 노동자의 유지와 재생산을 보장하는 한편으로 그들의 생활수단을 끊임없이 소멸시킴으로써 노동과정 밖에서까지도 노동자를 자본의 부속물일 수 밖에 없게 하는, (노예의) 보이지 않는 쇠사슬이다.

 

‘공정’이란 개념이 ‘소비’와 접목되면서, 전자가 후자의 원죄를 사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즉, 윤리적 만족감을 선사하는 소비가 이루어진다는 데서, 공정 무역 상품의 소비라는 행위가 지닌 모순이 드러난다.

 

자본론 제8편에서 살펴보았듯이, 그 태생이 다분히 폭력적인 자본을 지탱하게 하는 소비란, 그렇다면 애초에 과연 맑스 식으로라면 공정해질 수 있는 것인가라는 의문이 뒤따를 수 밖에 없다. 공정한 과정을 거쳐 생산되었다는 초콜릿을 구매하는 또다른 노동자의 화폐가 결국 자본이 변질시킨 기념일 중 하나인 발렌타인데이를 기리기 위해 소비된 것이라면, 이를 과연 공정하다고 볼 수 있을까? 제3세계 어린이들을 부당하게 착취하지 않고 생산해낸 축구공으로 월드컵이 치루어진다면, 이 상업적인 행사는 과연 공정해질 수 있는 것일까?

 

 

이른바, 시초축적

 

분명히 ‘공정’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기호 상품 위주의) 소비문화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되풀이되고 있는 자본의 부당행위를 제재할 효과적인 제어 장치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자칫 공정한 소비만이 자본주의 시스템에 대항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이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몸집이 작다는 이유로 고용되어 수많은 굴뚝에서 소리 없이 죽어갔던 어린 생명들의 피눈물로 탄생된, 자본의 생명을 유지시키는 ‘소비’라는 행위의 근본을 망각한 채, ‘지금’의 선한 의도만으로 '공정'하다 포장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농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아 양들에게 내어주고, 그들을 부랑자 혹은 임노동자로 비참하게 살게 했던 자본의 탄생과, 제3세계로의 식민 지배 과정에서 전파된 커피와 카카오 같은 기호식품의 세계적 확산. 이들의 시작은 그 근원이 폭력적이였다는데서 분명히 공통의 분모를 지닌다.

 

자본의 축적은 잉여가치를 전제하며, 잉여가치는 자본주의적 생산을 전제하며, 자본주의적 생산은 상품생산자들의 수중에 상당한 양의 자본과 노동력이 이용 가능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므로 이 모든 운동은 끝없는 순환 속에서 빙빙 돌고 있는 것같이 보이는데, 여기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우리는 자본주의적 축적에 선행하는 시초축적, 즉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결과가 아니라 그의 출발점인 축적을 상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자본론 1 p.979)

 

 

 

 

 

 

 

 

 

 

 

 

 

 

 

 

 

 

커피값 중 농민 수입을 두배로…맛과 향은 그대로 中 (한겨례/ 2006.9.1)

 

기사의 그래프로, 커피 생산 농민의 수익은 공정무역상품으로 거래시, 0.5%에서 6%로 상승함을 알 수 있다. 최종적으로 소비하는 일반 커피 한 잔의 가격을 5천원으로 산정시, 25원에서 300원으로 농민의 수익은 증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 거래되는 공정무역커피는 5.5%만큼의 가격인상분만을 반영해 거래되고 있는가?

 

그 아무리 공정한 거래를 통해 생산 노동자들에게 정당한(?) 임금이 지급된다해도, 자본이 자신의 유지에 필수적인 잉여가치까지 그들에게 건네주는 것이 아님은 분명해보인다. 공정무역거래제품이 일반 생산 제품에 비해 가격이 높은 대부분의 이유는, 해당 생산과정의 노동자들에게 지급되는 임금지불비용의 추가에 기인하는 것이다. 다시말해, 자본의 잉여가치에의 희생이 아닌, 대다수의 소비자, 즉 노동자가 다른 노동자의 임금의 추가분을 부담하고 있는 셈이다.

 

노동자계급의 개인적 소비는 노동력과의 교환으로 자본이 양도한 생활수단을 ‘자본이 다시 착취할 수 있는 새로운 노동력'으로 재전환시키는 것에 불과하다(자본론 1 p.777)

 

 

상품으로 변질된 '공정무역'이라는 '브랜드'의 함의

 

자본의 흐름에 주목하여 부당행위를 축출하고자 하는 공정 무역 상품의 소비의 확산은, 이제껏 '최소의 투자로 최대의 잉여가치를 뽑아내는 것' 만이 목표이던 자본가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의 실행에 제동을 걸기 시작했다. 그 ‘도덕적’ 가치는 위에서 살펴본 실질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자본에게는 ‘위협’으로 느껴지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러한 공정 제품 시장이 확대될수록, 공정한 소비를 하려는 구매자들이 지지하는 '선한' 의지를 반영하고자 하는 기업 역시 시장원리에 의해 확산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자본가가 잉여가치의 생산과정에서 저지르는 부당행위를 강제적인 규제가 아닌 시장의 원리에 의해 최소화할 수 있게 하는데 있어 중요한 단초를 제공했다. 실제로 스타벅스 같은 거대 기업까지 최근 들어 공정무역으로 생산된 커피를 사용한다고 광고하고 있는 것에서 그 변화를 엿볼 수 있다.

 

 

스타벅스 커피 원두의 구매원칙(perchasing Guidelines)

 

A. 품질(Quality)

: 모든 커피 원두는 사업의 필수요소, 즉 스타벅스만의 높은 품질기준을 만족시키는 원두만을 구매합니다.

B. 환경(Environment)

: 커피는 반드시 생태계 보호에 기여하여야 하며, 환경에 미치는 영향이 가장 적은 방법이어야 합니다.

C. 사회(Social)

: 근로자들의 임금과 수당은 반드시 그가 속한 지역 및 법이 요구하는 것에 부합하거나 혹은 그 이상이어야 합니다. 또한, 근로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하고, 적절한 생활조건을 제공하기 위한 효과적인 조치를 강구해야 합니다.

D. 경제(Economic)

: 커피 재배는 반드시 재배자들의 수익을 극대화하며,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고, 기반시설과 공공 서비스를 강화함으로써 지역 사회에 이익을 주어야 합니다.

 

스타벅스코리아 홍보자료

 

한국공정무역연합이 제시하는 ‘공정 무역’ 대 원칙과 다를 것이 없다. 스타벅스 역시 다른 공정무역커피업체와 마찬가지로 일반 가격의 두 배를 치르고 원두를 구입한다. ‘근로자의 건강과 안전을 보장하고, 적절한 생활조건을 제공하기 위한 효과적인 조치’를 강구할 수 있을만큼의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스타벅스 역시 공정한 기업일까? 실제로 공정무역이라는 이름으로 판매되는 상품의 가격과 그 효과를 생각할 때, 답은 명백하다. 농민에게 5.5%를 더 쥐어주고, 실제 소비자에게는 그 이상을 챙기는 자본의 또다른 마케팅 방법이 되어버린 것이다.

 

자본은 이미 ‘공정한 소비’라는 환상을 상품화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자본의 굴레를 벗어나 보려는 이들에게까지, ‘공정’은 ‘소비’라는 행위 자체의 부당성을 감추는 효과를 보여주는 것이고. 우리의 자본가들은 이를 또 다른 하나의 상업적인 가치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본의 ‘이른바 시초축적’이라는 공정하지 못한 원죄를 망각하게 만드는 ‘공정한 소비라는 환상’은, 자본, 자본주의를 유지하게 하고, 더 나아가 스스로 합리화하게까지 만드는 일종의 방어기제로 작용할 위험성을 지닌다. 그리고 그것은 ‘스타벅스’의 사례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스타벅스는 그 방어기제를 가장 ‘자본주의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회사인 셈이다. 공정무역이 거대 자본에 의해 이용되면 공정무역 마크가 붙은 각종 커피와 초콜릿, 여행상품들은 윤리적 만족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환상이 된다.

 

 

맺으며

 

원죄의 멍에를 지고 있는 인간들의 세상은 늘 혼란스럽고 불완전하니 모순된 이해관계를 가진 인간들의 갈등을 봉합해나가면서 사회 전체를 통섭하기 위해 강력한 국가와 교회가 필요하다. 유한한 인간은 그 제한된 이성으로 무한한 세계나 우주의 비결을 이해할 수 없으니 이성보다 전통, 전례, 여태까지 해온 방식 등이 먼저다. 불평등한 사유재산제가 없어지면 인간들이 게을러질 것이니 평등은 망상이다. 이성에 기반한 이상보다 현실은 먼저고, 좋을지 나쁠지 알 수 없는 변화보다 현상의 기본적 유지가 먼저다.(에드먼드 버크)

 

흔히, 보수가 좌파를 공격할 때 주로 쓰는 무기란 다름아닌 ‘현실성’이다. 그렇다면 현실적으로 가능한 다른 대안이 제시해보라고, 그들은 묻는다. '공정무역'이 '현실'을 인정하고 출발한 '덜 자본주의적'인 개념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이 '현실성'이 가진 모순 자체를 숨기는 도깨비 감투가 되어서는 곤란하다.

 

페르세우스는 괴물을 추격하기 위해 도깨비감투를 써야 했지만, 우리는 괴물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기 위해 도깨비 감투를 눈과 귀밑까지 깊이 눌러쓰고 있다.

 

우리의 상태에 대해 우리 스스로를 속이지 말자. (자본론 1 p.5)

 

'최선이 아닌 차악'을 선택해야 한다는 명제는 자본주의 사회를 인정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일종의 '원죄'다. 어쩌면 공정무역이라는 개념은 현실을 붕괴시키지 않으려는 자본주의적 '시뮬라크르'가 만들어낸 치료제일 수 있다. 일종의 '아편' 효과다. 그러나 '스타벅스'의 사례에서 보듯, 자본주의의 '치료제'가 브랜드화 돼 상품 그 자체로 활용되는 것은 치유제가 더 이상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됨을 뜻한다. 사람들이 이제 '공정무역' 커피가 아니라 '공정무역' 자체를 소비하게 되기 때문이다.

 

공정무역의 '상품화'를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다. 가장 시급한 작업은 '상품'으로써의 공정무역과 '운동'으로써의 공정무역을 분리해내는 일이다. 이후 공정무역이 어떻게 하면 더 공정하게 진행될 수 있느냐 하는 고민이 필요하다. 공정무역이 갖는 의미는 제 3세계의 노동자에게 정당한 이익을 돌려줄 수 있느냐 하는 것 이상의 무엇이다. 공정무역의 등장은 그 동안의 무역, 상품 거래가 얼마나 불공정했는지, 사유할 수 있게 하는 계기가 됐다. 공정무역이라는 개념의 등장 자체가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체제 자체가 가진 모순을 치유할 방법을 모색하는 일은 '자본'이 갖는 속성을 간파하는 데서 시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공정무역은 그런 근원적 고민 속에서 이뤄진 산물이다. 우린 공정 무역의 시스템을 통해 상품이 어떻게 거래되는지, 또 어떻게 소비되는지 새삼 깨닫게 된다. 일종의 '매개'이고,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일종의 '열쇠'다. 거기에 맞는 열쇠 구멍을 찾아내는 일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2010년 5월 6일 목요일

고백컨데,

 

사실 난 말이지..

별 볼일 없고, 갈 곳 없던 때의 네가 좀 더 좋았어. (라고 얘기해줄 사람, 어디 없나?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