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病
하 생활이 단조로운 때는 앓기라도 좀 했으면 하는 때가 있다. 감기 같은 것은 가끔 앓으나 병다운 맛이 적고 또 누구나 걸리는 속환俗患인 데다, 지저분한 병이기도 하다. 병이라도 좀 앓았으면 싶을 때마다 내가 생각한 것은 학질이었다. 벌써 8,9년 전 동경에 있을 때 나는 2,3년 동안 여러 직의 학질을 앓아보았는데 나의 체험으로는 어느 병보다도 통쾌스러운, 일종의 스포츠미味를 가진 것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떨리기 시작할 때의 그 아슬아슬함이란 적이 풀 패스가 되고 우리 피취가 투스트라이크 스리볼인 경우다. 그때 따스한 자리를 만나 이불을 푹 덮는 맛이란 어느 어버이의 품이 그리도 아늑하고 편안하고 또 그렇게도 다른 욕망이 눈곱만치도 없게 해줄 것인가! 그리다가도 그 소낙비 같은 변조와 정열! 더구나 그 열이 또한 급행열차와 같이 지나가버린 뒤의 밤중의 적막, 연정처럼 비등沸騰하고 연정처럼 냉각하고 연정처럼 고독한 것이 '미스 말라리아'다! 그의 스피드, 그 스피드로 냉각지대와 염열지대의 비행飛行. 그리고 나중의 빈 그라운드와도 같은 적막, 이것은 병을 앓았으되 한 연정과, 한 스포츠를 게임하고 난 것과도 흡사하다.
그런데 이런 말라리아는 다시 오지 않았고 시원치 않은 감기나 가끔 앓다가 이번에 어디서 아주 몰취미 극極한 상인들이 욕으로나 주고받고 하는 따위에 걸려 5,60일을 누워 있었다는 사실은 좀 불명예의 하나다. 가가呵呵 (무서록 中 , 범우사 p.88)
건강
나는 이번 병후에 완전한 건강이란 의심해본다. 나아갈 무렵 수십 일은 초저녁에 길어야 세 시간이나 네 시간을 잘 뿐, 그 긴긴 겨울밤을 뜬눈으로 밝히곤 하였다. 그 지루하던 시간에서 나는 몇 가지 소설 플롯을 생각하였다. 거의 전부가 슬픈 것들로서 그 인물들의 어떤 대화를 지껄여보다가는 내 자신이 그 주인공인 듯 흑흑 느끼고 울기를 여러 번 하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는 날로 곧 집필하리라고 매우 만족하였던 것이 여러 가지였었다.
그러나 오늘 이렇게 붓을 들 수 있는 때 생각해보니 하나도 쓸만한 것이 없다. 하나같이 안가安價의 감상물뿐이다. 불건강한 머리로 생각되었던 것이기때문이리라 생각하였으나 그렇게 웃어버리고만 말 수 없는 것은, 건강한 때 그 머리로 쓴 것 중에도 뒷날에 생각하면 "이걸 소설이라고 썼나!" 생각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지금도 건강한 체하나 지금 쓴 글이 이 후에도 또 "이걸 글이라고 썼나!: 소리를 내 자신에게서 받을 것이 없으리라 못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언제나 나의 머리에 완전한 건강이 생길 것인가? 한심스러워진다. 이것은 모든 범재凡才들의 비애일지도 모른다.(무서록 中, 범우사 p.94)
펼쳐두기..
병약한 사람들은 어디서 허세냐며 비난할만 하지만, 나 역시 어릴 적엔 좀 '아파보고'싶을 때가 있었다. 온 몸의 살들이 예민하게 쓸리는 기분을 느끼며 보송한 이불에서 땀을 흘리는 그 느낌이 은근히 쾌감을 준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물론 이런 종류의 이야기는 어디가서 잘못 내뱉으면, "너 마조히스트냐?"라는 비웃음을 사기에 딱 좋으므로 애써 표현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런 류의 감정이 나만의 것임이 아님을 이렇게 활자화된 글로 접할 때면 반가움보다는 서글픔이 앞선다. 사람이란 다들 비슷한 거구나.. 이렇게 사는게 사람이구나..라는 종류의 실망감이 들기 때문.
비단 병에 있어서뿐만 아니라,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헤어짐이라는 사랑의 필연적인 과정이 닥칠 때면, 태초부터 아픔의 이면에 마치 당연히 존재했던 것만같은 묘한 종류의 쾌감과 만나게 되는 순간이 있다. '이렇게나 아픈 걸보니, 내가 사랑을 하긴 했구나'라고 떠나가는 사랑을 한없이 애도하며 희열을 느낄 때가 바로 그 때이다. 때로 그 사랑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증명하고자하는 '오기'에, 아픔이 잊혀질만한 순간이 다가와도, 다분히 매달리는 심정으로 애써 고통을 반추하는 것은 이와 같은 이유때문이다. 희미해져가는 실연의 상처가 서러운 이유는 어쩌면 더이상 아프지 않아졌기에 생기는 감정일 수도 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상처받은 사람들' 속 몇몇 주인공들이 정확히 그러한 케이스인데, (그 소설을 읽을 무렵 나 역시 비슷한 상태였으므로) '도대체 무엇이 이러한 낭만주의적인 희생을 무의식으로 지배하는가?'라는 질문에 매달렸었다. 그 역설적인 심정의 배후에는 무언가 거대한 정치적, 사회적 음모가 숨어있을 것만 같았다. 안그러고서야,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까지 뒤틀릴 수가 있겠는가 싶었던 것.
지금와서 돌이켜보건데, 그 모든 역설의 감정들은 딱히 마조히즘적인 것도, 거대한 음모가 담긴 세뇌도 아니였지 싶다. 어느 순간부터 그저 사람이라면 병 그리고 사랑을 앓는 과정에서 누구나 그럴 수 밖에 없는 거라고 체념하게 되었다. 이제는 아픈 상태에서 내뱉는 수많은 쓸모없는 말들, 나아가는 상처를 다시금 후벼파며 생채기를 이어가는 행위 역시 모두 치유의 한 과정이라 믿고싶다.
어쩌면 우리는 한 번 앓은 이후, 다시 회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영원히 다시는 건강해지지 못할 병약한 운명이 우리 앞에 기다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또다른 병 그리고 사랑이 우리 앞에 닥치지 않겠는가... 인생이란게 그리고 운명이란게 언제 약한 자의 사정을 봐주며 살살 밀려온 적이 있었나? 그러니 그저 끊임없이 치유하며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나면 이내 곧 한없이 서글프고 서러워지지만, 남들도 다 이렇게 살고 있겠지라고 떠올리고 나면 또 그럭저럭 견디게 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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