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28일 수요일

소외의 시작점

 

 

 모름지기 사람마다 소설을 읽어내려가는 데 있어 '집중'하는 부분에는 차이가 있겠지만, 내 그것은 언제나 소설의 맨 앞, 첫 문단이다. 비록 일면식 없는 작가지만, 작품이란 매개로 어찌되었든 우리는 만나게 된 것이라할 때, 첫 문단은 만남에 있어 첫 인상과 같다. 비단 읽는 데 있어서뿐 아니라, 쓰는 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일 터. 새로운 만남 전, 어떠한 첫 인상으로 보여질까를 두고 고심하는 일을 작가라고 어디 피할 수 있겠는가? 흔히들 글을 쓰는 데 있어 가장 어려운 것이 첫 문장이다라고 말하는 건 다 이유가 있는 거다.

 

K가 도착했을 땐 늦은 저녁이었다. 마을은 눈 속에 깊이 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언덕은 안개와 어둠에 잠겨 있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며, 어렴풋이나마 큰 성이 있음을 알려주는 불빛도 없었다. K는 오랫동안 큰길에서 마을로 이어지는 나무다리 위에 서서 허공으로 보이는 데를 쳐다보았다. (성)

 

열일곱 살의 카알 로스만은 하녀의 유혹에 빠져 그녀에게 아이를 갖게 했다. 이 때문에 가난한 양친은 그를 미국으로 보냈다. 그가 타고 온 배가 속도를 낮추어 뉴욕 항에 들어오고 있을 때, 그는 멀리서부터 관찰하고 있던 자유의 여신상을 쳐다보았다. 자유의 여신상은 갑자기 더 강렬해진 햇빛을 받는 듯 했다. 칼을 든 팔은 마치 방금 치켜든 것처럼 우뚝 솟아 있었고, 여신상 주위에는 바람이 한가하게 불었다.(실종자)

 

 카프카의 일명 '소외 3부작'중 <성>과 <실종자>의 시작 첫 문단들이다. <성>의 첫 문단은 그 은유의 이미지들이 주는 효과때문에 다분히 시詩적이다. 안개와 어둠으로 뿌옇고 불빛이라고는 하나 없는 험난하고도 지리한 성으로의 길, 설사 그 여정을 다 마친다 해도 성이 결국은 허공일 뿐임을 첫 문단에서 모조리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성>처럼 강렬하진 않지만 <실종자> 역시 마찬가지다. 멀리서부터 관찰하던 자유의 여신상으로 대변되는 미국(내지는 산업사회). 하지만 더욱 강렬한 빛을 발하는 것 같던 그것을 가까이서 보니, 자유의 여신상에는 횃불이 아닌 칼이 쥐어져있는 것이다. 이 두 작품의 첫 문단들은 결말에의 예고 내지는 이어질 과정에 대한 복선 역할을 충분히 수행함과 동시에 작품 특유의 분위기를 훌륭히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함축적인 시어를 보는 것 같다.

 

 

누군가 요제프 카를 모함한 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무슨 나쁜 짓을 한 적이 없는데도 어느 날 아침 그가 체포되었으니 말이다.(소송)

 

 이러한 까닭에 <소송>의 첫 문단은 신선함을 넘어 조금은 당혹스럽다. 작품 전체를 휘감고 있는 '죄'와 '법률'에 대한 묘하고 기괴한 메타포를 어느정도 함축하고 있긴 하지만, 지나치게 간결한 것이다. 물론 소외 3부작 모두 기존의 익숙했던 시공간에서 주인공들이 별안간 탈락되면서 작품이 시작된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으나, 확실히 앞 선 두 작품에 비해 <소송>의 그것은 특이해보인다.

 

 카프카의 세 작품의 이러한 첫 문단의 차이에서 흥미로운 것은 <성>,<실종자>,<소송> 순으로 결말의 완성 여부가 다르다는 점이다. <성>은 이론의 여지 없이 미완성된 작품이며, <실종자>는 평론가들에 따라서 이 자체로 완성이라 보는 의견이 존재하긴 하나, 미완의 여지가 분명하다 하겠다. 하지만, <소송>은 주인공 요제프 카가 결국 '개처럼' 죽는다는 결말이 확실한 작품. 이렇게 결말을 짜맞추어 생각해보니, 좀 신기하다 싶지 않은가?

 

 알고보니, 카프카는 <소송>을 집필하며 첫 챕터 '체포'를 쓰자마자, 중간의 다른 과정은 건너뛴 채, 바로 마지막 챕터 '종말'부터 써내려갔다고 한다. 시작점과 끝점을 모두 결정해놓고서, 소송과정을 그 안에 채워넣은 셈이다. 카프카가 죽기 전, 브로트에게 미완성 원고들은 부디 태워 없애달라고 부탁했다는 사실을 반추할 때, 그동안 완성하지 못했던 소설들에 대해 스스로 상당한 노이로제에 시달렸음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미완의 집필 과정이 주는 괴로움을 극복해보고자 했던 의도였을까? 어찌되었든 이러한 특이한 작법 때문에 <소송>은 완성되어질 수 있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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