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4월 9일 금요일

오늘은 죽을 먹는 토요일이다 / 고형렬

 

 

토요일은 죽을 끓여 먹는 날, 싱크대 앞에 서서.

죽을 먹는 토요일은 진짜 죽이 된다, 죽만 남는다.

나는 죽사발을 들고 앉아 맛나게 떠먹는다.

그 순간, 모든 경전은 조용, 나는 문득 장님이 된다.

외팔이에 절름발이에 엉정벙정.

 

밥을 넣고 끓인 죽을 먹으면 나의 혀는 순해진다.

독설과 요설이 사라진다, 모든 꿈과 원이 죽는다, 죽처럼.

순해져 악한 내 마음의 뿌리가 통째 뒤흔들린다.

아 한그릇의 죽을 들고 서있는 詩夫여,

이 죽을 배우고 이 죽에 감사드리라, 어서.

토요일은 粥日이라네, 알곡밥을 먹지 않고 죽을 쑨다네.

곱은 불로 죽을 잘 쑤어, 잘 바스라뜨려 다스린 뒤

알곡이 없어졌을 때, 턱만 한 헌 주걱에 떠 받아

양지녘 한쪽에 가 앉아 고양이처럼 오직 죽만 먹는다.

담뿍, 담뿍. 왼손인 양 오른손으로.

 

나는 죽이 된다, 죽이라야 경계심이 죽는다.

육체 한쪽에 죽의 위만 달처럼 그릇처럼 남는다.

나는 이렇게 언제나 죽을 먹는 토요일에 도착한다.

저 죽을 먹고 앉은 화상을 보라, 토요일이다.

 

(2010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현대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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