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부터 서울에는 완연히 봄이 왔다고 착각할만큼, 따뜻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모처럼 찾은 동교동 산책길에서, 이제는 제법 봄기운이 느껴진다고 반가운 비명을 질렀다. 남친님 역시(아니나 다를까. 반팔티셔츠 차림으로 카페에 앉아 ㅋ) 조만간 도래할 '노천 카페의 시즌'에 대해 설레여했다. 유독 길고도 지리했던 겨울이 드디어 끝난 것만 같았고, 이 기세대로라면 당장 내일이라도 봄꽃들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기에... 콧노래가 절로 나오는 주말이었다.
봄이 올 때면, 제일 반가운 건 다름아닌 '꽃'들이다. 나 이래뵈도 꽃을 좀 좋아하는 여자.(읭?) 우리 집에 배달되는 정기간행물중에는 자그만치 월간 '더 플라워'까지 껴있는게다! 서울토박이인 외할머니와 엄마 밑에서 자란 태생적 한계 탓에, 제작년까지는 쑥 나물조차 구별못할 정도로 자연과는 동떨어진 삶을 살아왔지만... 도시여자답게 어디가서든 꽃에 대한 안목은 상당히 세련되었다고 칭찬받곤 했다. 압구정에서 꽤나 이름을 날리는 단골 샵에서조차 내 주문은 까다롭다며 혀를 내두를만큼, 플라워샵에서의 취향은 제법 '고급'인 편에 속한다.
'작년에는 꽂꽂이를 시작한 동생 덕에 색색깔의 거베라와 양귀비를 실컷 구경할 수 있어 참 행복했는데...',
'올해의 수국과 작약은 또 얼마나 예쁘게 피어날까?' 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자니, 가슴 속에서 갑자기 주체할 수 없이 '꽃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그래서 일기장에...
'꽃바람 부는 봄에 해야할 일'
- 섬진강변에서 매화 구경.
- 동백꽃 구경은 선운사에서.
- 북한산 철쭉 바위들 껴안기.
- 공주 꽃한정식집.
- 파주 양귀비 언덕.
- 양평 수국 숲.
- 지산 작약 밭.
- 뭐니뭐니해도 만월의 夜사쿠라는 남산이 제일이지.
따위의 꽃바람부는 계획들을 줄줄이 읊어놓았다.
이루어지면 추억이 될테고, 이루어지지 못하면 미련으로 남을.. 뜬 구름같은 공상 속에서 한참 헤매이다, 문득 작년 낙산공원을 오르다 발견한, 한참을 쳐다볼 수 밖에 없었던, 부숴진 연탄재 속에서 핀 이름 모를 들꽃 하나가 떠올랐다.
'섬진강 매화나 선운사 동백이야, 내가 아니여도 예뻐해줄 사람들이 널리고 널렸을텐데...'
'깨진 담장 사이에 핀 들꽃이나 개포주공 쓰레기통 뒷편의 벚꽃나무는 내가 아니라면 그 누가 알아줄까..'
라는 생각이 들어 순간, 갑자기 머쓱해지고 말았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것들을 예뻐하기란 참 쉬운 일이였던 것. 일상 속에 숨어있는.. 작고 보잘 것 없게 피어 즈려밟기 쉬운.. 이런 꽃들을 마주하는 날이면, 남들처럼 예쁜 것을 예뻐하는 일이 그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이였는지를 깨닫게 된다.
거대한 꽃들에게로의 여행이라.. 사실 '그까이꺼'라고 해버리기에는 너무나 유혹적이긴 하지만, 요새들어 왠일인지 길가의 이름 모를 들꽃들과 집 앞 가스 배관 뒤 잡초 같은 데 유독 눈길이 간다. 강변북로 언저리에서 자라나는 쑥들을 보고 있자면 애잔해지고, 봄바람 타고 우리 집 부엌 창가를 방문한 벚꽃잎 하나에 두근거리기도 한다. 이렇게, 언제부터인가 자꾸만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예뻐보이고, 이들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내 안목이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올 봄에는 우선, 다른 건 다 제쳐두고, 두꺼운 식물도감부터 한권 구입해놓아야겠다. 출근 길에, 산책 길에 마주칠 그 수많은 얼굴들과 '통성명'하며, 지금 부는 이 꽃바람에 응답하기.로 계획을 수정하였다. 이런 생각을 하며 귀가하다 유심히 살펴보니, 집 앞 공원 입구에 있는 목련나무의 움이 제법 탐스럽게 커졌더라.. 봄과 봄날의 꽃들이 어느새 이렇게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는데, 나는 너무나 먼 곳에서만 이들을 찾고 있었다.
(↓ 이 무심하고 시크하게 꽂혀있는 꽃은 다름아닌 '진달래'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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