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진정한 사랑'을 숭배하는 톰이란 남자가 있다. 친구들과 카페에 몰려 앉아 '그녀는 나를 좋아할까?'를 수십번이고 되묻는, 하지만 친구들이 무어라 대답하든 그에는 전혀 귀기울이지 않는 '어디선가 많이 본' 캐릭터다. 그러한 톰이 운명의 여자 '섬머'를 만난다. 곱게 기른 머리를 싹둑 잘라버리길 좋아하는 그녀는 부모의 이혼에 상처받아 '사랑따위는 개나줘'라 쿨하게 외치는 21C형 바이런식 여전사. '여자친구'라는 관계가 싫다는 섬머의 요구를, 톰은 다분히 '차이기 두렵다는 이유'로 순순히 받아들인다. 그들은 쇼핑센터에서 손을 잡고 다니고, 함께 샤워도 하는 애인같은 친구가 된다. '학교-집만 오고가는 모범생'같은 연애를 꿈꾸던 톰에게 이러한 관계가 애초부터 쉬울 리가 없다.
감독은 이 영화가 '흔한 러브스토리'가 아니라 강조하지만, 사실 이러한 일명 '0.65'짜리 연애는 세상에서 흔하디 흔한 것이다. 괜히 '그는 당신에게 반하지 않았다' 같은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겠나. 그 아무리 '사랑한다' 귓가에 속삭인다 해도 그 속내를 알 수 없는게 사람이라는 존재. 연인에게 끊임없이 사랑을 확인코저 하는 이는 역설적으로 그 관계에 확신이 없기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상대가 좀 더 확실히 관계에 대해 규명해주기를. 거짓이여도 좋으니 사랑을 외쳐주기를 기대한다. 왜? 그러한 형식 자체가 '사랑'이라고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톰은 섬머를 과연 사랑한 것일까? 영화 상영 내내, 톰은 섬머를 너무나 사랑한다고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를 쉽게 믿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톰이 사랑한 것은 '섬머'가 아닌 '섬머와의 로맨스' 그 자체 인 것이다. 그러니 그는 '섬머와의 관계', '그 관계 속에서의 판타지'에 집착할 수 밖에 없다. 실연 이후 톰이 스스로를 무너트릴 수 밖에 없는 이유 역시 여기에 기인한다. 그녀의 현재를 보지 않고 추억만을 곱씹다가 쉽게 원망하고 저주하는 일은 사랑의 주체가 형식 그 자체인 톰의 서사에선 너무나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렇다면 섬머는 과연 냉혹한 현실주의자였을 뿐인가? 애틋한 첫사랑에 대한 상처로 사랑따윈 믿지 않는다며 온갖 폼을 잡던 바이런이 사실은 지독한 낭만주의자였던 것처럼, 그녀 역시 이러한 낭만주의적 메타포에 자신을 끼워맞췄을 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히려 섬머는 톰보다 훨씬 더 고차원적인 낭만주의자이다. 톰이 밤하늘의 별을 벗삼아 꽃점이나 치고 있는 '러시아 시골처녀'같은 로맨티스트라면, 섬머는 고독한 도시 남자인척 하며 처녀의 마음을 사로잡는 '반항적 낭만주의자'인 셈이다. 이러한 뻔한 낭만주의적 서사들이 영화에서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까지 아직 되풀이되고 있는 것을 보고있자면, 확실히 '인류에게 지난 100년간 진보란 없었다'는 이론에 고개를 끄덕거리게 된다.
연인과의 이별 후, '인지가능한 세상 모든 것들이 화석화'되어버리는 경험을 하고, '필연의 운명같은 사랑'을 떠나보내지 못해 괴로워하는 그 모든 실연자들에게 '500일의 섬머'는 매우 본질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살면서 필연적인 사랑이 다가온다기보단, 필연적인 삶 속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것이 사랑이라는 것. 그 거대한 우연의 조합을 자꾸만 필연이라고 왜곡해 인식하면, 가장 기본적인 '내가 무엇을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조차 스스로 망각하게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스스로 실연의 고통에서 헤어나지 않고 이를 끊임없이 되풀이하려는 낭만주의적 희생자의 이미지를 '숭고하다'고 일컫은 괴테같은 이들도 있으니, 이것 참 못말리는 거대한 트랩이다. 그러니 정녕 당신이 경험한 '사랑'의 실체가 무엇이였는지 그 진리를 알고 싶다면, 이렇게나 뻔한 낭만주의나 로맨스라는 경계를 넘어서서 '실제로 내가 사랑한 주체가 무엇이였나.'라는 의문을 던져야만 하는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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