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름의 그림자가 火印처럼 찍힌 저녁 바다를 바라본다
나의 파탄이 누군가의 파탄으로 파도쳐 간다
어떻게 그댈 잊을 수 있겠는가
그토록 사소한 기억들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는 그대를
수 개의 등불을 끄고 한 권의 책을 덮으면
이 방의 어둠은 완성된다
행간에 머물던 내 시선이 곁눈질로 더듬었던 달빛이
방 안에 순식간에 스며든다
나는 나를 간절히 안아주고 싶기도 하고
이 세계를 두 발자국 만에 짓눌러버릴
거대한 눈사람을 저 모래사장에 우뚝 세우고 싶기도 하다
간혹 내 머릿속에선
옷을 입고 있는 사람과 벗고 있는 사람이
나를 버린 이들의 목록을 둘러싸고 논쟁을 벌인다
그리고 간간히 동시에 떠오르는 다른 죽음들
회환과 자조로 가득한 겨울밤
과거를 향하여 이를 가는 짐승
파도를 가지 치며 수평선 위로
쑥쑥 자라 오르는 미래의 날카로운 환상
그때 뜨거운 물을 숨긴 주전자 같은 영혼은
내가 셋을 세기도 전에 태어나는 것이다
완벽한 혼란이 아니라 혼란스런 완벽으로부터
여관방 구석의 냉장고에선
실금 같은 빛이 새어나와 세계를 야금야금 톱질하기 시작한다
결국 극단을 택할 것인가, 나는
(2010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현대문학)
펼쳐두기..
지난 겨울 초입, 그간 벼르던 '겨울 바다 여행'을 진짜로 다녀와보자고 결심하고 짐을 꾸렸다. 세상의 온갖 고통이란 고통은 다 겪어본 '닳고 닳은 여자' 처럼, 뱃사람들로 시끄러운 항구의 퀘퀘한 여관방에서 외로이 겨울 바다를 바라보고 싶었던 것. 당연히 이런 컨셉(?)의 여행이라면 지극히 '혼자' 가야 마땅한건데, 계획을 들은 동생님께서 굳이 본인도 따라가겠다며.. 도무지 '협조'를 안해주는게다. 손수 운전까지 하시겠다고.. 심지어 경비까지 전액 부담하겠다고..우기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그녀와 함께 동행하는 조건으로 여행을 떠났다.
때 마침 비도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었고, 안개까지 자욱했던 까닭에... 서울에서 주문진까지 차로만 7시간이 걸렸다. 게다가 중간엔 무슨 호러무비도 아니고.. 고속도로에서 야생동물이 출현해 놀래키질 않나, 산 기슭 주변을 지날때면 라디오 주파수가 잡히지 않아 '입으로 방송'을 해야했지 않나, 별의별 복잡스런 상황들이 이어졌다. 겨우 목적지에 도착하고 보니, 이거 뭐. 항구는 온통 술집과 아가씨들로 북적북적. 혼자였다면 귀찮다고 그 근방에서 대강 방을 잡았겠지만, 동행자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해수욕장 쪽으로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날 주문진 해수욕장의 그렇게나 어두룩했던 겨울바다는, 내게 '어떻게든 살아보자'는 의지를 선물했다. '꾸역꾸역 사는 편이 그래도 살지 않는 것보단 낫겠다'고 조근히 속삭여주었던 것이다. 칸트가 이야기하던 '숭고미'라는게 진정 무엇을 뜻했던 건지, 나는 그제서야 아주 약간 알 것만 같았다. 극단을 택하지 않도록 말을 건네준 그 날의 주문진과 그때의 그녀를 생각하노라면, 아직까지도 가슴 한구석이 싸해져온다.
I've looked at love from both sides now
From give and take and still somehow
It's love's illusions I recall
I really don't know love at all 조니미첼의 목소리가 오늘따라 유독 구슬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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