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3월 17일 수요일

유토피아와 디스토피아

 

 

 지지난주였나? P는 지인 중 누군가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징역살이를 했던 과거를 회상하며, '내게 있어 소위 운동을 강제한 추동력은 그 어떤 유토피아로의 지향보다는 현실의 끔찍한 디스토피아때문이었다'고 말한 일을 전해주었다.(물론 비루한 내 기억력에 기인한 형편없는 '워딩'이긴 하나, 분명히 이런 취지의 대사였다. ;;) 그렇다면, 내게있어 지금같은 소위 니체 식의 '반시대적인' 사고를 끊임없이 강요하는 건 과연 어느 쪽인걸까? 이야기를 전해 들은 이후, 은근히 머리 속에서 쉬이 떠나지 않는 질문이지 않을 수 없다.

 

 철학이 정치적이 되고 시대에 대한 비판의 최고 경지로까지 이르게 된건, 언제나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지칭했던 '유토피아'와 더불어서다. 그렇다면 이 '유토피아'란 과연 무엇일까? 그 유명한(?) 유토피아주의자였던 사무엘 버틀러가 사용한 'Erewhon'이란 단어는 사실 '아무 곳에도 없는'(no-where)뿐 아니라 '지금 여기'(now-here)라는 이중의 의미를 내포한다. 따라서, 어쩌면 공상 속에 존재하는 유토피아와 현실의 디스토피아의 구별은 무의미할지 모른다. 이 두가지 역설적인 이미지들은 서로 다른 곳을 향한다기보다는 차라리 유토피아의 여러 유형들 중 어느 것이라 불리울만 한 것이다.

 

 들뢰즈는 이같은 이론을 설파하며, 혁명을 내재성의 유토피아라고 말하는 것이, 그 어떤 꿈이나 실현될 수 없는 혹은 스스로를 배반하지 않고서는 실현 불가능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자본주의에 대항하는 투쟁에 있어 지금-여기에 실재하는 그 무엇과 연루된 '무한한 운동'만이 혁명이며, 앞서의 혁명이 배반당할 때마다 새로운 투쟁들을 '다시 시작하게 만드는 추동의 힘'이 혁명이라는 것이다. 때문에 혁명 내지 유토피아는 다분히 '정치적'인 개념일 수 밖에 없다고 설명한다.(철학이란 무엇인가 / 현대미학사)

 

 사실 유토피아 혹은 혁명이란 개념은 어쩔 수 없이 상대적일 수 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이만하면 혁명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이 다른 이에게는 성에 안찰 수도 있는 것. 이러한 상대적인 개념을 가지고 어느 한 사회적 영역 안에서 행해지는 특정한 제도 내지는 방법만을 논해서야, 유토피아나 혁명을 말할 수 없다. 오히려 비록 이성적이거나 합리적인 그 무엇도 지니고 있지는 않지만, 지금-여기에서 무한하게 사유하게끔 강제하는 '힘'내지는 '열정' 그 자체를 '유토피아' 내지는 '혁명'이라 보아야하는 것이다.

 

 

 리장을 떠나 샹그리라를 거쳐 더친으로 향했다. 샹그리라, 디칭(迪慶) 티벳족 자치주로 본래 이름은 중덴(中甸). 윈난 지역에 한번도 가 본적 없는 제임스 힐튼이라는 영국 소설가가 '잃어버린 지평선'이라는 자신의 소설에 티벳 지역을 배경으로 지상낙원을 등장시켰는데 그 이름이 '샹그리라'다. 목격하지 않은 목격자의 말만 믿고 수많은 학자들이 '샹그리라'를 찾아 나섰다. 이들은 1997년 샹그리라가 디칭에 있다는 결론을 내렸고, 중국 정부는 2001년 재빠르게 중덴을 '샹그리라'로 개명했다. 역시 공격적 '관광 마케팅'의 일환이었다. 중국이 잃어버린 '낙원'을 만들어낸 것이다.

 

 잔뜩 기대하며 거닐었던 작은 도심은 생각과는 꽤 달랐다. 배낭족들이 몰려들며 생겼을 법한 '기와 올린 웨스턴 바'가 자주 눈에 띤다. 낙원, '유토피아'라는 말은 라틴어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을 뜻한다. 중국 정부가 지정한 이곳은 따라서 더 이상 '유토피아'가 아니다. 예전에는 유토피아였을지 모를 일이지만.

 

 샹그리라를 나섰다. 더친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 티벳 성도 라싸(拉薩)를 향해 온몸을 던지는 무리들을 봤다. 오체투지하는 티벳 스님들이다. '우리의 독립'을 바라는 이 티벳 스님들이 '너희 모두의 평화'를 위해 머리를 땅에 찧는다. 그랬다. 드디어, 하늘의 샹그리라가 지상에 당도했다. 우린 '중덴'을 빠져나왔던 것이었고, 샹그리라는 오체투지 행렬을 이룬 스님들 사이 사이에 성기게 배어 있었다.

 

('착한' 중국 기행…"우리는 '공정족'이다" / 프레시안)

 

 나로 하여금, 반시대적 내지는 비현행적, (푸코식으로라면) 현행적인 사고를 강제하는 것은 어쩌면 '유토피아', '디스토피아' 둘다 모두 아닐런지 모른다. 더이상 유토피아로 불리울 수 없는 '샹그리라' 한켠에서 '지상에 당도한 샹그리라'를 찾게되는 현실, 그것에서 촉발되는 사유와 열정. 그 자체가 이미 '샹그리라'이자 '유토피아'이고, '혁명'이다. 그저 강제되는 사유에 오롯이 몸을 맡긴채,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어 보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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