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덮인 한 권의 책
아무런 쓸모 없는, 주식 시세나
운동 경기에 대하여, 한 줄의 주말 방송프로도
소개되지 않는 이따위 엉터리의.
또는, 너무 뻣뻣하여 화장지로조차
쓸 수 없는 재생 불능의 종이 뭉치.
무엇보다도, 전혀 달콤하지 않은 그 점이
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시로 덮인 한 권의 책, 이 지상엔
그런 애매모호한 경전이 있는 것이다.
그 어떤 신을 위해서랄 것도 없는.
하지만 누가 정사에 바쁜 제 무릎
위에 얄팍하게 거만 떠는
무거운 페이지를 올려놓는다는 말인가?
그래, 누가 시집을 펼쳐 들까
이제 막 연애를 배우는 어린 소녀들이,
중동에 있는 친구에게 편지를 쓰는,
아니라면 장서를 모으는 수집가의
희고 가느다락 손가락이
뒷장을 열어 출판 연도를 살펴볼까?
양미간을 커튼같이 모으며 이것
굉장하군! 감탄하는
끈끈한 조사와 형용사로 단어와 단어 사이를
교묘히 풀칠하는 당신의 시.
그따위 것을 누가 찾아 읊조린단 말인가
절정의 순간에 한 줄의 엘리엇을 읽어주어야만
만족해하는 성도착증의
젊은 부인을 위해? 혹은
강단에서 시를 해석하는 문법학자의
조심스레 미끄러지는 입술에서나
그것은 팽개쳐질까. 아무런 열의도 없이
이해하겠어요, 이 작가의 콤플렉스를?
지루하게 외쳐대는 오후의 강의 시간에나
시인과 시인이 맞붙어 싸우는 이
암호부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두터운
안경을 맞추어야 할까. 그리고 얼마나
마음 멍청하면 사게 되는 것이냐, 아무리 찾아도
국립극장 초대권 하나 붙어 있지 않은
이 한 권의 책을. 놔둬 버리지
서점의 제일 높은 판매대에 꽂혀
먼지가 만지도록 그냥, 놔둬버리지
제일 아래쪽 밀대가 지나다니며
까맣게 구정물이 먹도록. 구석을 찾아
이리저리 천대받도록 그렇게 놔둬
버리지. 이따위, 엉터리의
(햄버거에 대한 명상, 민음사)
펼쳐두기..
이번 주말에는 어쩌다보니 꽤 많은 영화를 보게됬는데, 그 중 '그린 존'과 '크리스마스 캐롤'은 마치 소설의 행간을 읽어내리듯, 많은 생각을 강제하게 만든 영화들이었다. 촉발된 사유들은 당연하게도(!) 그 어떤 정형화된 구조를 지니지 못한채 마구 내뱉어졌고, 이 때문에 꽤 즐겁고도 생산적인 대화를 지속할 수 있었다. 재밌는 건 이 대화에서, '지옥의 묵시록'과 '그린 존'을 비교하며 미국인의 눈으로 보는 전쟁 영화의 한계를 논하다가 (뜬금없이) '문학적이라는 건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시작된데 이어, '크리스마스 캐롤'의 원작자 디킨즈를 이야기하다가 (역시나 어이없게도)'시와 산문'에 대한 질문으로 끝을 맺었다는 것.
'인간은 누구나 시인이나, 살면서 시를 잃어버렸고, 그래서 잃어버린 시를 찾아 거리를 헤맨다'는 로르카의 시론을 듣고나니, 블랑쇼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더라.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려고', '들을 수 없는 것을 들으려고' 하는 것이 시라는 블랑쇼의 정의는, 태초에 시가 있고 우리는 그를 쫓아가지만 결코 닿지 못하는, 마치 블레이크의 태양 같은 다분히 '역설적인 이상'을 말하고자 했던게 아닐까.
- 휴우.. 어떤 독자층을 상대로 새로운 사유를 생성하게 하는게 산문의 이상이자 예술성이라 쳐. 나는 도저히 시는 어떻게 봐야할지를 모르겠어. 내 능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이거든.
- 모든 작가는 처음에는 시인을 꿈꾸다가, 그 다음엔 단편 소설을 쓰고 싶어하고, 결국 장편 소설 작가가 된다잖아. 시라는 게 그렇게 어려운거지.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태고의 이상 앞에서 느낄 법한 경외감을, 요새들어 나는 시에서 종종 느끼곤 한다. 비루한 내 감각으로는 결코 접근이 허용되지 않을 절대적인 그 어떤것... 단순히 두터운 안경을 끼고 공부한다 해서 절대 알 수 없을, 이 '무한으로 생성중인 카오스'같은 시들 앞에서, 나는 오늘도 먼지마냥 작아진다. 물론 세상에는 여전히 쉽게 씌여지고 쉽게 읽히는 시들이 많겠지만, 모든 산문의 존재를 나름의 이유로 무시할 수 없는 것 만큼이나, 쉽게 읽히는 시는 어느 것 하나 없어보이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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